백양로 재창조 프로젝트

중앙도서관 앞 공사현장에서 자전거 발전기로 앰프를 켜고 젬베를 두드리며 노래하는 이들을 보았다. 그 뒤편에는 천막이 있었고 우리 학교 교수로 추정되는 어른들이 앉아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백양로 재창조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지하 주차장 공사에 대한 학내·외의 반대는 결코 만만하지 않다. 공사현장을 알리는 컨테이너 담장에는 이미 “갑영산성”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공학원에서부터 중앙도서관으로 이어지는 초목들은 뽑히거나 잘려나갔다. 땅은 이미 여기저기로 파헤쳐지고 있다. “올해도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구린내를 맡고 싶다”라고 하는 귀여운 푸념이 가벼이 읽히지는 않는다.

나 역시 창조에는 파괴가 수반되며, 변화에는 고통이 뒤따름을 안다. 미래에 더 좋은 시설을 갖춘 학교를 다니게 될 후배들을 위해 우리가 좀 참아주자고 하는 점잖은 의견도 있다.

그러나 나의 실망은 공사 그 자체나 공사가 주는 불편함에 있지 않다. 오히려는 한 번 땅을 파기 시작하면 어떻게도 원상복구가 불가능한 공사라는 수단이 최후의 보충적인 수단으로 고려되지 아니하고 가장 우선적인 해법이 되어버린 이 상황이 실망스러운 것이다.

현재 구성원이 겪어야 할 불편은 당연히 감내할 수 있고, 감내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 딱히 불평의 대상도 아니다. 나로서는 그저 지성의 전당이라고 자처하는 대학의 문제해결능력이 고작 이 정도 수준이라는 것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보다는 바삐 지나치기만 하는 나 자신의 한심함도, 느끼고야 말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스물아홉을 살게 될 줄은 몰랐다.

ENTJ

MBTI, MMPI 검사를 위해 학교 상담센터에 들렀다가 무려 8년 전에 했던 MBTI 결과를 받았다. 2004년 12월 3일에 했으니, 대학교 1학년 가을학기 막바지였다. 그때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검사를 했는지 모르겠다.

결과는 ENTJ. 인터넷에서 간이테스트를 통해 나의 유형으로 알고 있던 ENTP와 달랐다. 검사는 해놓고 결과를 찾아가지 않은 터에 8년 만에 재검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같을까, 다를까 궁금하다.

ENTJ는 “외향성 사고형”으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며 활동을 조직화하고 주도해나가는 지도력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내가 지향하는 모습에 부합한다.

내 모습과 맞다고 생각되는 건 다음의 부분이다:

ENTJ들은 비슷한 성향을 가진 객관적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항상 현실적 상황과 사실이나 중요한 세부사항을 돌보기 위해 현실감각이 좋은 사람이 주위에 필요하다.

내가 학생회장을 할 당시 부학생회장이던 강영준, 학회를 처음 만들었을 때 이를 도와주던 신우섭, 그들 덕분에 큰 탈 없이 조직을 운영할 수 있었다. 이 대목을 읽으며 그 둘이 딱 떠올랐다.

또 하나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어쩌면 내가 지나치게 부정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두고 보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ENTJ들은) 그들의 논리적 접근에 너무 많이 의존하기 때문에, 감정기능의 가치를 간과하기 쉽다. (…) 그들은 남을 인정하는 기술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 다른 사람의 장점과 아이디어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배우자에 대한 부분은 특히 흥미롭다.

성격이 뚜렷하고 독자성이 강해야 하고, 취미가 다양하며 건강한 자긍심이 요구된다. (…) 남성으로서는 아내가 사회활동에 능동적이고 자기만큼 교육과 교양이 있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다시 만난 라이어 공연 팀

토요일에 라이어 공연 팀을 다시 만났다. 정확히 4년 하고 6개월이 지났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어도 다시 만나서는 공연 얘기를 했다. 누가 어떤 실수를 했느니, 준비가 어땠느니… 조각난 기억을 조금씩 모으며 추억을 어루만졌다.

나는 공연 직전에 우이동으로 갔던 합숙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합숙 둘째날 엄청나게 마셔댄 탓에 마지막 날 함께 돌아오지도 못하고 종석의 도움을 받으며 기숙사로 돌아왔던 끔찍한 경험 때문인 것 같다.

다들 하나도 안 변한 것 같다. 아직은 그게 좋다.

학회를 다시 시작하는 이들이 즐거웠으면 한다

비단 학회, 정연회에 국한되는 얘기는 아니겠지마는…

조직이 굴러가려면 우선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모이는 이유는 다 다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자신의 욕구 때문이다. 남과 사귀고 나를 드러내려는 욕구, 대화를 나누고픈 욕구, 공부를 더 해보려는 욕구, 공동체를 꾸려나가고픈 욕구 등.

어떤 이는 욕구에 단계도 있고 차등도 있다고 봤지만 그랬거나 저랬거나 모든 욕구는 그 욕구가 타인과 공동체에 심각한 위해가 되지 않는 한에서 장려되얄 것이다.

나는 배움의 즐거움이 욕구의 최종 단계라 생각했다. 결국은 배움의 즐거움으로 모두 수렴하여 조직을 사랑하게 되리라. 따라서 조직은 형식지이건 암묵지이건 사람에게서 배우건 책을 통해 배우건 배움을 주는 마르지 않는 샘이어야 했다.

그게 나의 비전이라면 비전 같은 것이었다. 다만, 현재적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지금 즐겁고 그러면 끝이라는 한계. 아마 가장 좋은 비전은 ‘함께 꾸는 꿈’이리… 그러려면 우선 자신이 그 꿈을 진심으로 믿어야 한다. 과연 나는 그랬는가.

선의로 시작한 조직, 운동이 개인의 희생과 불행으로 끝나는 안 좋은 과거를 너무나도 많이 봐왔다. 이건 나의 트라우마라면 트라우마다. 리더는 희생양의 대용품이라고 하지만, 타인의 인생을 망쳤다는 얘기까지는 듣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무언가를 줄 수 없을 때, 선뜻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달라고 하질 못했다. 그만큼 자신이 없었다는 얘기도 될 것이다. 연이은 작은 성공에도 왜 그런 불안을 가졌는지 잘 모르겠다. 정녕 내 믿음이 약했는지도 모른다.

학회를 다시 시작하는 이들이 즐거웠으면 한다. 서로를 환대하고 우정을 나눴으면 한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체로 만났으되 차이를 존중하며 연대감을 느꼈으면 한다. 정말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아줬으면 한다.

공동체와 대의

나라 걱정하는 연정인이 몇이나 될까? 내가 아는 바로는 몇 안 된다. 나부터가 나라 걱정보다는 내 앞가림에 바쁘다.

소위 ‘연정 프라이드’라고 하는 건, 누가 알아주건 말건 입신양명보다 공동체와 대의를 앞세우는 의식에서 정당화 된다.

우리는 이렇게나 물신주의가 팽배한 각박한 세상에서, 나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남과 공동체를 위해 공부고 머리 싸매며 고민한다는 그럴싸한 우월의식의 발로이다.

지금 연정인 가운데,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우리 사회의 숨은 의제를 깊이 파고 들거나 공동체의 명운이 걸린 주제를 미리부터 공부하는 이가 누가 있나.

당장에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멀지 않은 미래에 공동체가 필요로 할 것을 대비해 칼을 정성들여 갈아두는 이가 있는가.

어느 수업의 자기소개

아마 이연호 교수님 수업이었을 것이다. 강의 첫 시간에 A7 정도 크기의 메모지를 나눠주시면서 자기소개를 써서 내라고 하셨다. 장래희망도 같이 쓰라고 하셨던 것 같다. 아무튼 그걸 사진까지 붙여서 내라고 하셨다. 그때 내가 무슨 내용을 썼나 궁금하다. 아직 교수님께서 그 메모지를 갖고 계신다면 찾아가서 한 번 보여달라고 하고 싶다. 그래서 확인하고 싶다. 그 당시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했는지…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거기에 쓴 대로 살고 싶다. 지금부터라도.

졸업 즈음, 희망의 증거

졸업즈음 글 한 편 쓰겠노라 생각하고 있다.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할까, 일기처럼 쓸까, 소설로 쓸까, 시로 쓸까… 형식이야 어찌됐든 내용은 ‘정리’가 될 것이다. 무엇을? 나의 지난 4년 6개월의 삶을…

졸업을 하고 군입대를 하게 되는 것은 앞으로의 삶에 실제적으로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모르겠으나, 지금으로선 썩 만족스러운 수순이다. 어쨌든 확실히 정리가 되는 것이니까.. 객관적인 정리는 그렇게 되고, 나는 내 나름의 주관적 정리를 해야한다.

떠날 때가 되니 더 많이 주지 못한 것이, 나누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게 느껴진다.

대학생활 내내 알게 모르게 선후배, 동기, 스승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꼬집어 누굴 언급하는 것은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고… 아무튼 그들로부터 지적 자극, 삶의 방법, 호연지기, 용기, 지혜를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언제나 나는 성취, 성공보다 실수, 실패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나를 든든하게 받쳐준 이들 덕분이다. 헌데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나?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러운 대목이다.

꼭 대학에 왔어야 했을까?

지금이야 다른 선택도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만, 진학을 결정할 당시에는 이런 질문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시간과 돈, 땀을 쏟아서 수험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일단은 가보자”라는 생각이 가장 컸다.

왜 꼭 연세대학교였나?

역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여느 대한민국 고3들처럼 손에 쥔 성적표를 들고 합격을 기원하며 원서를 넣었을 뿐이다. 입학하고서는 다른 궁리할 여지 없이, 어쨌든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며 열심히 생활했다. 지난 4년 6개월의 시간에서 내가 성장할 수 있었다면, 그건 다 이 대학이라는 공간과 이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다. 진심으로 감사한다.

대학에 와서도 여전히 부모, 친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타지에서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정신적·관계적 의존도는 자연스레 낮아졌지만, 여전히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아마도 무의식에 각인됐들 정서적 울타리 덕분에 자기파괴적 생활도 아주 짧게 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딘가 썼는데, 한 때는 ‘부모 때문에 산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여전히 내가 지닌 문제의식 태반은 부모로부터 기인하는 것이긴하다. 대학에서의 공부, 생활은 이 문제의식을 보다 객관화, 일반화해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이제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나의 부모들’을 위해서 살 것이다. ‘그들’이 곧 ‘나’이기 때문이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노무현의 낙선과 이후 유시민의 개혁당 창당. 당시 넷키드였던 나는 예민하게 이 사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정서를 누구보다 공감해줄 것 같았던 아버지께 이메일로 당시 인터넷에 떠돌던 동영상과 글들을 모아서 보냈다. 돌아온 것은 전혀 예상밖의 호통이었다. “공부나 해라!” 지금은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지만, 당시의 나는 너무나 서러워서 혼자 끅끅 울었다.

대학에 입학하고서도, 건강관리 다음에는 “우선 실력을 키워라!”라는 질책을 가장 많이 받았다. 대학 입학 후에는 더 기고만장해서 대들었고, 대구에 내려갈 때마다 조용히 지내긴 힘들었다. 그러고 서울에 돌아와도, 용돈은 제 날짜에 꼬박꼬박 입금해주셨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시다. 지금은 내가 먼저 내 앞가림에 신경쓰고, 내 삶에 책임을 지려고 하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격한 대립은 없다. 이제는 그냥 져드리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도 하고, 부모가 나를 품어주었던 것만큼 내가 보듬어 안아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 아무래도 물질적 보답은 별로 자신이 없다. 그러나 부모가 몸소 가르쳐 준 바, 물질적인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사회계열로 입학해서 굳이 정치외교를 전공으로 선택한 이유는 “‘정치’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금은 그 정도로 순진하진 않다. 정치, 특히 한국에서의 정치는 늘 ‘소수’를 위한 것이었고, 그것이 마치 ‘다수’를 위한 것인양 포장되어 왔을 뿐임을 안다. 이제 정치는 ‘희망’과 함께 말하기엔 어색한 것이 됐고, 오히려 ‘인민의 절망’과 더욱 친화력이 있다는 것도 안다. 아무튼 목적이 있었던 바, 현실 동학을 보는 비교정치 보다는 정치 규범을 정초하는 정치철학, 정치사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국제정치는 흥미도로 따지면 그만한 재미가 없으나 현실 영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됐다. 정치경제를 접한 이후론, 경제도 함께 공부하면 목적한 바에 더욱 부합하겠다 싶어 경제학 이중전공을 결심했다. 그 결과가 썩 개운한 것은 아니었지만, 좋은 선생님들로부터 새로운 시각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열심히 공부했노라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라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학기 중에 정말 많이 나돌아다녔다…) 대학에서의 공부가 삶에서, 현실에서 그렇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내 결론이다. 학문의 종속성과 식민지성, 보수성… 그럼에도 그 속에서 희망을 본다면, 역설일까? 지나친 낙관일까?

대학을 졸업하는 마당에, 베베 꼬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입학할 때처럼 냉소적인 채로 머물러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책상물림만 하지 않고 많이 부딪히고 깨지고… 험한 꼴도 봤지만, 덕분에 쉽게 접할 수 없는 속살들을 맛보았다. 오호라… 더 많은 삶의 면면들을 들여다보는 일에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다. 때론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이 훨씬 많았다. 물론 대다수는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살아간다.

배움을 구하는데 적극적이었던 덕에 더욱 많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위에 있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그런 기운들… 정말 좋은 기운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래, 이 사람들이 희망이다… 그리고 또 어디엔가에도 이만한 사람들이 꿋꿋이 제 삶을 꾸려나가고 있을 것이기에… 나는 그들의 걸음이 더디겠지만 온전하기를 바라며 소박한 기도를 품는다.

다른 삶은 가능하다는 자신감과 믿음, 몇 번의 실패에도 기어코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걸어가는 용기와 열정, 지속 가능성을 위한 상상력과 흔들리며 걷기 위한 끊임없는 자기반성…. 삶의 실험, 삶의 시험은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기필코 ‘삶’으로 증명해내리라, 다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빚어내는 예술가이다. 나는 내가 先生들을 통해 배웠던 또 느꼈던 ‘희망’을 내 주위와 내 다음 이들에게 전달하고 싶다. 나 역시 하나의 희망의 증거로서.

값진 하루

안산 정상에서는 강렬한 아침 햇살이 짙은 안개를 걷어내고 있었다. 내려오면서 목도 축이고 간단한 체조도 했다.

그러다 서대문구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전도사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수행원 1명과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부지런한 보수를 이기기란 쉽지 않겠군’, 이런 생각을 했다.

기숙사 윗길을 통해 수영장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을 우연히 발견했다. 아니 원래부터 그 곳에 있었지만, 관심으로 다가가지 않았기에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주지 않았다.

방에 돌아와서는 땀이 찬 운동복을 널고 샤워를 했다. 때마침 연락이 와서 함께 아침을 먹고 강의실로 향했다.

날이 좋았다. 연희관 앞에서 또 동문까지 부비적 거리며 걸었다.

날이 참 좋았다. 미안하다 뫼르소. 나는 쬐는 볕에 방아쇠를 당기기 보단, 좀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좀 더 울어보고 싶었고 고통받고 싶었고 녹아내리고 싶었다. 살고 싶었다.

의지가 마지막 희망이다

아무리 마음이 힘들어도 그것과 무관하게 꾸준히 무언가를 하는 편이 좋은 것 같다. 나는 ‘힘들어도 꾹 참고’ 이런 건 잘 못한다. 살면서 한 번도 수사 이상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야, 정말 참는 데까지 참았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잘 참지도 못할 뿐더러 참는 데까지 참았으면 계속 참지 뭣하러 그런 말을 하는겐가 싶어서, 였던 것 같다. 어차피 참아주는 거라면 끝까지 참아주거나, 처음부터 확실하게 선을 긋거나.

연초에는 하루빨리 ‘이 곳’을 떠나고픈 마음 뿐이었는데, 지금은 좀 숨통이 트인 느낌이다. 상황이나 조건 탓 하지 않으려는, 주어진 것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마음 먹었고, 결국에는 ‘나’의 결정이나 행동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했고, ‘구조’를 만들어내지 못한 ‘행위’는 그 한계를 내포하지만, 그럼에도 값진 것이라는 약간의 정신승리법스러운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모든 것을 ‘의지’의 문제로 환원할 생각은 없지만, 내게는 ‘의지’가 마지막 희망이다.

왜 공부를 하는가…?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결국엔 즐거우니까…, 이걸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게 제일 보람있게 느껴지니까… 정도인 것 같다. 오히려 거창한 대의명분이 있다면, 지금 당장에도 공부말고 다른 할 일은 넘쳐난다. 아무튼 공부는 가급적 앞으로의 삶과도 밀접하게 결합시키고 싶고…, 이게 결국 ‘잘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요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정도로만 생각하고 살고 있다. 고3 시절 마인드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