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자

두 여자가 지하철 승강장 벤치에 한 뼘 정도의 간격을 두고 마주보고 앉아있다. 벤치 양 쪽으로 상행선과 하행선이 바삐 들고 난다. 열차에 큰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아 둘이 할 이야기가 아직 한참 남았다. 그런데도 따로 카페로 옮기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이 둘은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만났기 때문이거나 ― 아니다. 우연히 만났는데 이렇게 벤치에까지 앉아서 대화를 나눌리는 없다. ―, 아니면 카페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면서 둘만 따로 지하철을 타기 위해 이동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왼쪽으로 몸을 틀고 앉은 여자는 투피스 정장에 검정 스타킹, 얇지만 풍성한 흰색 머플러를 하고 있다.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그 위에 자홍색 토드백을 놓고 또 그 위에 양 손을 모으고 있다. 손동작은 안경을 고쳐 쓸 때만 빼고 거의 없다. 안경테는 각진 얼굴에 어울리기 어려운 동그란 모양이다. 격식을 갖추는 것까지만 신경을 썼다. 그 이상은 하고 싶지 않다. 패션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입만 움직일 뿐 눈이나 코 근처의 다른 주름은 큰 움직임이 없다. 할 얘기만 할 뿐 굳이 감정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뒷모습만 보이는 여자는 얼핏 보아도 수수한 차림새이다. 토 부분만 색이 다른 단화를 신고 있다. 앞이 뚫린 샌들인가 싶었다. 얼핏 보기에도 군살이 없고 말랐다. 관리를 아주 잘 하였던 것인지 아니면 타고난 체질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병환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건강함이 뿜어나오는 느낌은 아니다. 맞은 편의 여자와 동년배가 아닌 것은 확실하고, 적어도 열 살 이상의 나이차가 있을 것이다.

오른쪽에 앉은 이 여자는 강의가 끝났지만 자리를 뜰 줄을 모르는 열정적이지만 눈치는 없는 학생처럼 말을 이어가고 있다. 전화나 문자, e-mail은 고려 수단이 아니다. 답답한 속내를 이야기할 때는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제일 좋다. 무언가 답답한 구석을 말끔히 해소해주기를 아니면 최소한 자신의 상황을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앉은 자세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 대화가 끝나고 지하철에 올라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혼자서는 해결하기 버거운 짐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재산 문제일까, 자식 문제일까. 아니면 재산으로 인한 자식들 간 다툼이 문제일까, 자식들로 인해 재산이 바닥이 난 문제일까. 어느 쪽이라고 해도 이미 이 여자의 손을 떠난 문제이다. 그건 이 여자도 알고 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그것을 맞은 편에 앉은 여자에게 묻고 있다. 이렇게 단 둘이 이야기 하는 시간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 연락처를 받을 수는 있지만 자신의 연락에 답할 것이라는 확신은 없다. 그렇다고 답신을 강제할 정도의 보수를 지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당장 그의 친절에 기대어 이렇게 함께 있는 시간을 늘이는 것이 최선이다.

『우리가 보낸 순간』과 김연수

작가 김연수를 좋아한다. 최근에 김연수를 더 좋아하게 된 일이 있었다.

친구의 생일선물로 책을 주려고 했다. 워낙에 책 선물을 좋아한다. 받는 상대방이 뭐야, 책이야? 실망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책을 선물 받을 때의 나는,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살아갈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그런 기분을 함께 받곤 한다. 그래, 이 책을 읽어야겠구나. 읽으려면 살아야겠구나.

마음산책에서 펴낸 『우리가 보낸 순간』 시편과 소설편 중 시편을 선물하기로 했다. 직장일로 바쁜 그에게는 호흡이 짧고 여운이 긴 시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연수가 꼽은 보석 같은 시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정말 값지게 읽었다. 한마디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하는 책을 선물하기로 한 것이다.

새 책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수중에 돈이 몇 푼 없었으므로 읽던 책을 그대로 선물하기로 하고, 그래도 역시 선물은 포장 뜯는 맛이니 포장지에 싸서 주기로 했다.

신촌에 있는 오래된 책방, 홍익문고에 들러서 넌지시 책 포장이 되느냐고 물었다. 책을 포장하려면 얼마 정도 듭니까. 그랬더니 따로 가격이 책정되어 있지 않아서 돈을 받고 해드릴 수가 없다. 아마 맞은편 H백화점에서도 포장이 될 것이니 그리로 가보시라.

백화점 포장,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라고 하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바로 그 대표적인 예가 백화점 포장인데. 나는 난색을 표하며 그러면 내가 여기서 다른 필요한 책을 살테니 그 책 대신에 이 책을 포장해달라고 하면서 가방에서 김연수 책을 꺼냈다.

그러자 김연수 책을 본 그 분께서, 활짝 웃으면서, 아 김연수씨 책이에요? 그럼 그냥 해드릴게요. 하시며 룰루랄라 야무진 손맵시로 책을 이쁘게 포장해주었다.

이 책의 발문에는 이른바 ‘다섯 배의 법칙’이 나온다. 부정적인 말 한 번이 주는 악영향을 상쇄하려면 최소한 긍정적인 말 다섯 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려 다섯 배란다. 다섯 배.

그런데 작가는 남들의 부정적인 말보다 내 안의 무의식이 더 무서운 것이라고 썼다. 나는 재능이 없어, 소질이 없어, 아마도 안 될거야. 누가 뭐라지 않아도 어느새 내 안에서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는 말들.

매일 글을 쓰면서, 작가는 자신이 “인간으로서는 좀 더 나은 인간이 됐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건 전적으로 글쓰기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날마다 글을 쓰면서 나는 자신을 비난하는 일을 그만두고 가장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일을 매일 연습한 셈이니까.”라고 덧붙인다.

이 책을 샀던 홍대 주차장길에서 아래 대목을 눈으로 훑으며, 울컥,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질이 없다는 말을 듣기 전에 우리는 소질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매일 좋아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 그러므로 쓰라. 재능으로 쓰지 말고, 재능이 생길 때까지 쓰라.

… 비난하고 좌절하기 위해서 쓰지 말고, 기뻐하고 만족하기 위해서 쓰라. …”

이렇게 말해주는 작가 김연수를 나는 좋아한다.

어머니와 함께 10분 글쓰기

어머니와 10분 글쓰기를 시작했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글쓰며 사는 삶』을 읽고서 착안했다.

10분 글쓰기란 10분 동안 정신없이 쓰고 잠시 쉬다가 다시 10분 동안 정신없이 쓰는 방법이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자신없어 하셨지만, 일단 시작하니 10분 정도는 끄덕없이 쓰셨다. 어머니랑 나는 고작 두 페이지 써놓고는 같이 울었다.

오늘은 이 정도로 그치기로 했다.

『글쓰며 사는 삶』 (나탈리 골드버그, 2010)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를 읽고 “우리가 무언가가 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모두 작가가 되어야 한다”라고 쓴 적이 있다. 지금이야 꽤나 화끈거리지만, 그 당시엔 그 정도로 벅차올랐다.

『작은 것들의 신』으로 잘 팔리는 작가가 된 그녀는 권위있는 문학상인 부커상 수상 강연으로 전세계를 돌다, 돌연 미국의 제국주의를 겨냥한 정치평론을 뱉어냈다. 나는 환호했다 무릇 작가라면, 이런 글을 써야한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글쓰며 사는 삶』은 제목 때문에 집어들었다. 원제는 Wild Mind, 즉 “야생의 마음”이다. 부제가 이 책의 제목인 Living the Writer’s life이고, 한국어판의 부제는 “작가적인 삶을 위한 글쓰기 레슨”이다.

‘야생의 마음’은 순수한 열정이 가득한 상태이다. 모든 감각을 통해 주위 세계를 예민하게 느끼고 부지런히 손으로 옮긴다. 단, 쉬지 않고 쓴다. 게을러도 좋고, 기다림도 좋다. 지체없이 쓸 수 있으면 된다. 솔직하게 두려움에 맞서 쓰면 된다.

저자는 선(禪) 수행에 관심이 많다. 그는 글쓰기도 하나의 명상으로 본다. 그러나 또 치유는 아니란다. 치유의 기능을 위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그냥 쓰는 것이다. 목적 없이, 대가 없이 쓴다. 쓰는 행위가 일상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글쓰며 사는 삶”을 산다.

생각이 바뀌었다. 굳이 ‘작가’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작가가 뭐 별 존재인가? 매일 꾸준히 쓴다면 누구나 작가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어머니와 ‘10분 글쓰기’를 시작했다. 책을 읽고 나면, ‘나도 한 번 써볼까’ 싶을 것이다. 맞다. 누구나 쓸 수 있다.

책 읽고 글 쓰는 일

비싼 밥 먹고도 한 번씩 공상을 한다.

“어떠한 물질적 사회적 제약조건도 없는 상황이라면, 어떤 ‘일’을 업으로 삼을 것인가?”

아예 일이나 업에서부터 벗어나면 안 될지 되물을 이도 있겠다만, 맑스에 의하면 인간의 유적 본질은 노동이므로 최소한의 인간성 담보를 위해 그러한 도피는 불가하다고 하자.

이 질문에 나름의 답을 몇 차례 던져봤지만, “책 읽고 글 쓰는 일” 외에는 답을 할 수가 없었으니 나도 참 무미한 인간이다 싶다.

그리고 이 일은 지금도 간간이나마 하고 있고 또 할 수 있으니 이 역시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싶다.

『글 읽기와 삶 읽기 2』 (조한혜정, 1994)

지식과 권력은 어떤 관계인가

조한혜정 교수의 수업은 대학시절을 통틀어 제게 많은 영향을 준 강의 중 하나이다. 학생들을 방목하기 보다는 지향점이 분명하고 “놀면서 하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조한혜정 교수의 강의를 들은 덕에 이 책 1권과 2권을 구입했고, 강의 들을 당시에 1권을 읽었다. 2권은 다른 책들에 밀려 책장 맨 윗칸에 꼽혀있기만 했다. 그러다 최근에 틈틈이 다시 읽게 되었다.

2권의 주요 내용은 ‘식민지 지식인의 자기 반성’과 ‘학문, 문화의 자생력을 기르기 위한 저자의 고민’이다. 핵심 물음은 “지식과 권력은 어떤 관계인가? 누가 지식을 만드는가? 지식 생산의 주체는 누구인가?”하는 것이다.

지금껏 우리는 지식 ‘습득’에만 관심이 있었지, 지식 생산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무심했다. 주권의 종속은 끝났지만, 경제적·문화적 식민지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너도나도 트렌드랍시고 ‘탈근대’를 말할게 아니라, 여전히 (서구의 지식, 문화로부터의) ‘탈식민’이 화두여야 한다는 것이다. 종주국에서 학위를 따고 돌아온 식민지 지식인으로부터, 무비판적으로 지식 습득에 힘쓰고 있는 대학생들의 처지가 안쓰럽다.

이 책의 제4장은 대학교 1학년 세미나 첫 커리큘럼으로 써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제1장, 제6장도 훌륭하다. 탈식민론(포스트-콜로니얼리즘)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접하고 싶다면 제2장, 제3장을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여성’으로서 ‘주변적 고민’을 하고 있다면 제5장을 읽어보라. 이 험난한 남성 중심의 사회를 헤쳐가는데 든든한 우군을 확보한 느낌이 들 것이다.

책 추천과는 별개로 여담을 하나 하자면, 조한혜정 교수의 수업에서 배운 것 중 또 하나가 ‘쪽글 쓰는 법’이었다.

우선 텍스트를 읽는게 처음이고, 그 다음에 텍스트와 거리를 두면서 산책도 하고 놀기도 하고 생각을 삭힌 다음에 어깨에 힘 풀고, 최대한 자유롭게.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재미있게, 풀어내는 글쓰기. 그렇게 해야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다나?

정치, 외교와 같은 ‘큰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 문제’, ‘일상의 문제’에 대해 소홀한 경향이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조한혜정 교수의 인류학 수업과 그가 권해준 몇 권의 책들을 통해서 그 둔감함을 조금은 고친 것 같다. (아직 예민한 단계에 이르러면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