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운동으로 진 짜기

(…) 한국에서 정치인이 되는 경우는 두 가지다. 방송인, 학자 혹은 고급 공무원으로 유명해졌다가 단번에 국회의원이 되거나, 많은 돈을 지키려면 정치적 권력이 필요해 국회의원이 되는 경우다. 이런 구도에서 20대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거의 없고, 그들 자신도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20대 현실에선 두 가지 조건 다 갖추기 어렵다. (…) 내가 생각하는 […]

정치의 열 가지 원칙

(…) 여기 적는 열 가지는 원칙은 원칙대로 고수하면서, 변화된 시대를 염두에 두고 나름대로의 새로운 접근방식을 찾아 자신의 앞길에 적용하길 바랍니다. (…) [이 노하우는] 주체적으로 소화해서 취사선택한 사람만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출세하는 정치쟁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진리와 정의를 위해서 일생을 바치고 국민과 민족을 […]

광해, 왕이 된 남자 (2012)

한가위, 어머니와의 인터액션을 위해 영화관엘 갔다. 어머니는 이런 소소한 나들이를 몹시 좋아하신다. 평소엔 누나가 이런 데이트메이트가 되어주지만, 지금은 산후조리원에 있으니 올 한가위에는 내가 이 역할을 맡았다.

어머니와 함께 볼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내 딴엔 까다롭다.
첫째, 외화는 가급적 지양한다. 아는 배우도 없으시고, 자막 읽기도 힘드시다.
둘째, 세밀한 관찰을 요하거나 복잡한 내용 전개를 가진 영화도 안 된다.
영화는 오로지 즐기기 위해서 보는 것이다.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

그렇게 선정된 영화가 바로 이병헌 주연의 <광해, 왕이 된 남자>다. 주위 지인들의 평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아주 재밌게 보셨다. 천한 잡놈이 용상에 앉아 왕 흉내를 내며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하시는 장면에서 특히 많이 웃으셨다. 나로서는 대만족이었다.

이 영화의 묘미는 크게 두 가지다. 임금과 외양이 닮았다는 이유로 왕 행세를 하게 된 천한 잡놈의 우여곡절이 그 첫째요, 얼떨결에 시작한 왕 노릇에 본격적으로 감정이입하며 “궁의 법도” 혹은 “정치 논리” 따윈 아랑곳 않고 소신을 펼치는 활약이 그 둘째다.

극 중 인물들은 물론이고 영화관의 관객들도 이 가감없고 솔직하며 “정녕 백성을 하늘처럼 아는” 왕의 등장에 한껏 고무됐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하나를 줘야 하나를 얻는 것”이라는 ‘정치 논리’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충직한 신하를 기꺼이 구하며 옳은 제도라면 과감히 밀어붙이고 사대보다는 실리를 취하여 백성 목숨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지도자의 탄생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 말이다. 내 평가가 맞다면,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열망을 등에 업었던 대통령이 딱 한 번 등장했었다.

가짜 왕이 등장하기 전, 진짜 왕이던 광해군은 언제 ‘저들’이 자신을 해할지 몰라 노심초사하며 결국 자신과 꼭 닮은 대역을 앞세우고 사흘이 멀다하고 여성을 품어야만 편히 잠들었던 결단력 없고 비열하며 고관들의 등쌀에 눌리는 그러한 왕이었기에 그 대비가 더욱 극명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한 충신에 말을 참고하면, 왕이 되기 전 광해는 “전란의 화살비에도 불구하고 백성을 돌보던” 자애로운 왕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뜨거운 대중의 열망과 함께 청와대로 갔던 ‘바보’ 대통령은 끝내 부엉이 바위 아래로 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인권 변호사로 명성을 날렸던 그의 대통령 재임기간에 가장 많은 비정규직이 만들어졌고, 가장 격한 노동탄압이 이뤄졌으며, 적지 않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투쟁을 이어갔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광해라고 달랐을까? “백성을 하늘처럼 알던” 그 가짜 왕은 언제까지고 그 모습 그대로 일까? 자타 공히 왕이 된 순간에도 전주에서 올라와 어매를 그리던 열 다섯 애기 기생을 빌어 자신의 장형을 면했던 그 비겁은 어떻게 치유할까? 금에게 조선 백성을 무사히 돌려보내달라는 서신을 보내는 게 정녕 외교적 득이 더 많은 처사였을까?

대중은 언제나 ‘가짜 왕’과 같은 지도자를 갈구한다. 제 잇속을 챙기는 신하들을 따끔하게 혼내고, 지주들도 다 같은 백성이라며 논점을 호도하는 고관들을 질책하고, 사대주의자들에게 “적당히들 하시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하며 호통을 칠 수 있는, 그런 정치인을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판타지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

“대중은 ‘진짜 정치’, ‘현실 정치’(realpolitik)를 알지 못한다”는 식의 비하가 아니다. 그보다 오늘의 대중은 스스로가 왕정의 신민이 아닌 민주주의 정치의 주체임을 자각하고, 각자가 자신의 ‘진짜 정치’를 해야한다는 뜻이다. 영화의 말미, 도승지 허균(류승룡 분)이 “그럼 진짜 왕이 되시든가!” 다그치자 가짜 왕 하선이 나지막이 답했던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 생각한다.

『직업으로서의 정치』 (막스 베버, 전성우, 나남출판, 2007)

여전한 설레임과 서늘한 통찰을 주는 글이다. 가장 힘빠지는 대목은 “이 문제는 우리의 중요 관심사가 아니므로 다음에 다루도록 한다.”는 것이다. (계속 공부해야 하고, 그러나 그것까지 다루면 논점이 흐려지기에 다음에….)

그렇게 해서 달려간 종착점에서는 직업 정치가가 가져야 할 요건이 기다리고 있다. ‘비창조적 흥분 상태’와 구분되는 ‘객관적 태도’로서의 열정, 그리고 책임의식, 마지막으로 이 둘을 가능케 할 균형감각이 그것이다.

직업 정치가라면 자신의 내적 기반 ― 즉, 신념 ― 에 의해 행동하되, 자신의 행동에 의한 결과까지도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베버가 강조해마지 않는 책임윤리이다. 반면, 신념윤리는 자신이 가진 신념만으로 정당하며 그 결과는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직업 정치가가 베버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정치 영역에 헌신하고자 한다면, 그는 그 속에 숨어있는 악마적 요소들에도 민감해야 한다.

트로츠키의 말처럼, 현대 국가는 폭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하고 있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때론 수단이 정당화 될 수도 있다. 아니. 베버는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이 정당화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목적의 달성, 즉 자신이 실행한 바에 따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념윤리란 마지막 순간에 개인적 소회를 통해서 드러나야만 가치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념윤리가 없다면, 헌신과 열정은 생기지 않고 허무한 껍데기 속에서 공허함을 느낄 뿐이다. 고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는 상보적 관계에 있다. 가슴 깊은 곳에는 신념윤리를 간직하되, 행동에 있어서는 책임윤리를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

베버는 ‘나이든 이’로서 경고한다. “10년 뒤에 어디 두고봅시다”라고. 내 강연을 듣는 이 중에 몇이나 여전히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책임을 갖고 살고 있을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정치의 영역에 뛰어들기 보다는 평범한 시민으로 행복하게 살았으면 낫지 않겠냐고…. 그럼에도, 자신이 정치에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두꺼운 널판지를 뚫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늘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도전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현재로서 가능한 것조차 달성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dennoch!)의 자세. 직업 정치가, 소명을 가진 정치가에게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해야만 하는 때는 “바로 지금!”이다.

부차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현대 정당 발전 과정에 대한 베버의 사회학적 통찰 역시 새겨둘만 하다. 특히 코커스(caucus), 전당대회와 같은 ‘기계’(machine)의 등장은 ‘대중적 독재자’의 출현을 초래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영혼이 없는 명망가 정치가 득세하게 될 뿐이라는 분석은 모종의 이분법으로 우리의 선택을 종용한다. 현대 정당체제에서 정말로 주어진 선택지는 그 둘 뿐인가? 어쨌든 한국의 경우는 전자에 더욱 가까운 것 같다.

또한 대체적으로 직업 정치가는 변호사이거나 저널리스트, 이익집단, 당 관료 등으로 시작하는 편이 좋다고도 덧붙인다. 변호사는 자신의 고용인을 위해 질 법한 일도 이길 수 있는 논증을 퍼부으며, 이길 수 있는 일은 더 잘 이기도록 하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다. 직업 정치가의 중요한 자질인 연설 능력, 글쓰기 능력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널리스트의 경우에는 글쓰기의 능력이라는 부분에서 주목 받으나 ‘글쟁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고, 당 관료는 ‘정치꾼’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이익단체 소속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현대로 올수록 저널리스트는 점점 정치에 의존해서 살기 힘들어진다는 점에서 이익단체 활동을 통해 정치 영역에 입문하는 것은 바람직한 경로라 하겠다.

베버는 정치, 정당 제도로서 외적인 요건이 가지는 특성과 직업 정치가의 내적 자질에 대해서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 제도적으로는 어쩔지 몰라도, 영국의 경우에는 의회 정치가 발달하고 독일의 경우에는 관료 정치, 미국의 경우에는 대중적 독재가 가능할 지 몰라도, 어쨌거나 직업 정치가의 자질을 따질 때는 ‘윤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좋거나 싫거나 직업 정치가의 손에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릴 지렛대가 쥐어져 있다. 이 수레바퀴를 아무나 굴리게 할 수 있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직업 정치가에게 책임윤리를 강요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애시당초 이 무거운 질곡을 견뎌내지 못할 사람이라면 그 영역에 뛰어드는 것 자체를 만류해야 한다.

현대 정치 제도에 대한 것으로 출발한 베버의 강연은, 결국에는 청중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이 정말로 직업 정치가로서의 자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시길 바라오.
비창조적 흥분 상태를 열정으로 오해하지는 않고 있는지,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말이오.”

West Wing 시즌 7

장장 7개 시즌의 대미는 민주당스럽지 않은 산토스와 공화당스럽지 않은 비닉의 대결.

민주당 후보 산토스는 라틴계, 해병대 출신으로 젋고 정력이 넘친다.

반면, 공화당 후보 비닉은 전통적인 보수당 표밭인 캘리포니아 상원의원이지만, 낙태 문제에 있어서 개인의 선택을 중요시하는 입장이고(pro-choice) 게이 결혼 문제를 굳이 의제로 삼고 싶어하지 않는다.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 리오 맥게리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박빙의 승부에서 승리한 산토스는 공화당 후보였던 비닉을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으로 지명하여 입각시킨다.

West Wing이 바틀렛 행정부 1, 2기의 모습을 주로 다루면서 친민주당(pro-democratic) 선전물(propaganda)이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는데, 마무리는 결국 미국적 민주주의의 이상이라 할 ‘초당파적(bipartisan) 화합’으로 그려진다.

아이들이 싼 값에 우유를 마실 수 있는 권리

West Wing에는 많은 명장면이 있지만, Season 1 막바지에 조쉬 라이먼이 바틀렛이 뉴잉글랜드 주지사이던 시절, 그의 연설을 회상하는 장면이 있다. 이 연설은 조쉬 라이먼이 나중에 부통령이 되는 호인즈의 밑에서 바틀렛의 참모진으로 옮기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낡고 어둡고 한산한 유세장에서, 바틀렛이 한 낙농업자의 질문을 받는다. “저는 당신이 하원 의원이던 시절에 세 번 투표했고, 주지사로 두 번 투표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하원에서 뉴잉글랜드 낙농계약에 반대하는 투표를 했죠. 전 그 투표에 피해를 입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당신의 해명을 듣고 싶네요.”

특유의 지긋한 표정으로 낙농업자를 응시하던 바틀렛은

“그 문제에서는 제가 당신을 속인 겁니다. 골탕을 먹인거죠. 당신 뿐만 아니라 많은 제 지지자들이 한 방 먹은겁니다. 오늘날 빈곤한 미국인들 중 가장 많은 수가 ‘어린이’가 되었습니다. 네, 저는 반대 투표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우유를 사먹기가 힘들어지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때문에 화가 나서 절 원망한다면, 저는 전적으로 그것을 존중하겠습니다. 다만, 미합중국 대통령에게 뭔가 다른 것을 기대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투표하세요.”

리오의 부름으로 바틀렛을 보러왔던 조쉬 라이먼은 곧장 워싱턴으로 돌아가서 잘 나가는 로펌의 변호사인 샘 시본을 꼬드긴다. 아니, 단 한 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는다. “조쉬, 네 얼굴만 봐도 알겠어. 그는 ‘진짜’였구나!” 조쉬는 (물론 리오에 대한 깊은 신뢰도 있었겠지만) 한 눈에 바틀렛의 진면목을 알아보았다. 샘은 그런 조쉬의 눈을 믿고 당장에 로펌을 때려치고 함께 바틀렛 캠프로 들어간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여전히 정치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 이건 정말로 무책임한 말이다. ‘잘’ 모르겠다고? 그럼 ‘조금’은 알겠다는 말인가? 정치가 답을 줄 것이라 믿고 정치외교학 전공을 선택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제 발로 미궁 속에 들어왔구나’ 싶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진짜’를 만날 수 있을까?

다문화사회로 가는 한국 : 제16회 연세 지역학 학술회 참가기

아직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담론이 여물기 위해서는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분명히 이것은 ‘시간’ 문제이다. 오늘날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인종의 비율은 약 3% 정도로 1960년대 후반의 유럽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가속화 되고 있는 지구화의 흐름과 점차 국경이 희미해져가는 추세에서 한국이 예외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다문화주의가 제기된 과정: ‘동등한 대우’에서 ‘차이의 인정’으로

김남국 교수는 유럽에서 다문화주의가 제기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째, 사회적 소수의 숫자가 일정수준 이상이 되면 사회적 소수는 다수와 동등한 사회경제적 대우를 요구하게 된다. 둘째, 경제적 인정을 넘어선 문화적 생존을 주장하게 된다. 다문화사회의 갈등이 본격화 되는 것은 두번째 단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한 사회의 지배적 문화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문화 차이를 공공영역에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첫째 단계는 보편적인 인권 차원에서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다른 인종, 다른 민족, 다른 국적, 다른 문화적 배경의 인간이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인정은 근대 국가에서는 그렇게 어려운 수준이 아니다. 근대 국가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구성원 간의 무차별성과 동질성에 기반한 국민 의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이가 존재한다면 제도적으로 이 차이를 경감시켜야 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에서 사회적 소수가 요구하는 문화적 생존권이 쉽게 인정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문화적 생존권의 인정이 기존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불편함은 공공영역에서 다문화적 생존 권리를 지원해주는데서 오는 매우 구체적인 것이다.

사회적 소수: 소수 인종과 소수 민족

사회적 소수도 소수 인종ethnic minority과 소수 민족national minority으로 나눌 수 있다. 소수 인종은 자발적 선택에 의해 이민을 택한 사람들로 사회경제적 인정은 원하지만, 정치적인 분리나 자치를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반면, 소수 민족은 역사 속에서 다수 민족 사회에 병합, 정복 당한 경우로 소수 인종에 비해 보다 전투적으로 자치나 문화 보존의 권리를 주장한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소수 인종은 다문화사회인 미국 내의 한인 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소수 민족은 영국의 경우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등이 될 것이다.

유럽의 대응: 관용, 비차별의 법제화, 다문화주의

이러한 다문화의 도전에 직면해 유럽의 대응은 크게 세 단계의 변화양상을 가진다고 한다. 첫째가 관용이고, 둘째가 비차별의 법제화, 셋째가 다문화주의이다. 관용은 매우 필수적인 덕목이지만, 다수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점에서 언제나 자의적으로 멈출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비차별의 법제화는 다수가 소수를 차별하는 표현, 접근 방해, 물리적 폭력 등을 가중 처벌하는 것이다. 다문화주의는 정책적으로 문화적 권리를 지원하는 단계이다.

한국은 위의 세 단계 중에서 아직 관용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지만, 이주노동자 문제나 베트남 결혼이주자 문제는 더이상 한국 사회가 높은 동질성을 고집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현상이다. 사회적 양극화 해소와 절대빈곤층 해결은 여전히 시급한 사회경제적 현안이긴 하지만, ‘다문화주의의 대두는 한국 사회의 존엄과 민주주의를 시험하는 사례’가 될 것이다.

프랑스의 공화주의와 영국의 심의다문화주의: ‘원칙’과 ‘합의’라는 두 방법

김남국 교수는 프랑스의 공화주의와 영국의 심의다문화주의라는 두 나라의 고유한 원칙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사회에의 적용 가능성 여부를 명확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프랑스의 공화주의는 홍세화 씨가 늘상 강조하는 그 똘레랑스를 바탕으로 기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비차별의 제도화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영국의 심의다문화주의는 관용은 물론 비차별의 제도화와 문화적 권리를 행사하는데까지 나아가 있다. 프랑스의 공화주의는 분명한 원칙으로 논리적 명쾌함을 보여주지만, 문화적 생존권 보장이 미약하다. 영국의 심의다문화주의는 공공영역에서의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방식이지만 자의적인 판단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다수제 민주주의와 합의제 민주주의: ‘지루한 일상’이 될 정치

한국 사회의 원칙은 다수제 민주주의majoritarian democracy라 할 수 있다. 다수결은 민주적 의사결정의 기본이다. 그러나 다수결이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소수 의견의 존중과 소수의 권리 보호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는 곧 ‘사회적 연대감’이 사회에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다수결에서 소수가 구조적 소수로서 반복되는 게임에서 계속 소수가 된다면 단순 다수제simple majoritary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합의제 민주주의consensual democracy의 대표적 형태인 협의제 민주주의consociational democracy네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 내 다양한 하부 집단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둘째, 이렇게 인정된 집단의 대표들이 대연정을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것, 셋째 이 대연정의 구성원칙으로 비례성을 존중하는 것, 넷째가 각각의 집단이 상호거부권을 갖는 것이다.

김남국 교수는 ‘한국 사회가 다수제 민주주의에서 합의제 민주주의로 이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각 집단이 상호거부권을 가지게 되면 정치가 항상 정체되어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김남국 교수는 ‘유럽의 경험에 비춰보았을 때, 각 집단에 상호거부권이 주어지더라도 학습효과를 통해 거부권을 행사하기 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정국을 운영해나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다문화사회에서는 한 사회에 지배적인 거대담론이 존재할 수 없으며, 정치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의 합의’를 도출해내는 지루한 과정이 될 것이라고 한다.

정리: 한국 사회의 다문화와 심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공론장

앞서 얘기했듯, 현재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갈등을 걱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로 생각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다문화에 대한 대응이 주는 교훈은 단순히 사회적 소수의 문화적 생존권 인정이 하나의 사회 규범이 된다는 것에 있지 않다. 다문화적 요구에 대한 대응이 주는 교훈은 다문화사회에서 갈등을 조정하는 기본적인 원칙이 ‘대화와 타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원칙이 깨어지고, 분열된 사회의 갈등이 그대로 거리에서 표면화된다면 사회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소수 민족에 의한 갈등보다 소수 인종에 의한 갈등이 예상되므로, 극단적인 사회 불안은 예외적인 상황이라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이들의 2세 그리고 베트남 결혼이주자와 이들의 2세의 비율이 계속 늘어나고 있고 탈북 이주민의 수도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다문화 정책이 마련될 필요는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단순 다수제에 의한 정치 게임은 이러한 소수 구성원들을 배제시키고 최소한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동등하게 부여하는 정도에서 끝날 염려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단 한 사람의 정치적 의견이라도 존중하며, 가능한 많은 사람의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합의제 민주주의는 유의미한 이행으로 보인다.

갈등은 예상보다 더욱 심각할 지도 모른다. 어떤 소수자 집단의 지배적 문화가 소수자 집단 내부의 소수 문화를 억압하는 경우(이를테면, 특정 종교의 여성 차별)도 있을 수 있고, 소수자 집단의 대표가 해당 소수자 집단을 충실히 대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소수 집단의 문화적 권리가 기존 사회의 지배적 문화적 가치와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해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 방법은 대화와 타협 뿐인 것이다. 그대화와 타결이라는 원칙의 반복 게임을 통해 대화 관습habit of dialogue을 학습해야 한다.

이런 협의제 민주주의, 심의다문화주의의에서 대화 관습을 학습하고, 대화와 타협의 원칙을 배양하는 시민교육의 장소로서 강조되는 것이 바로 공론장이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공론장은 생활세계와 정치를 연결해주는 중간 역(域)이다. 이제 실천적 물음이 제기된다. 한국 사회에서 공론장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또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편 가르기

“너는 어느 편이냐?”

방문이 벌컥 열리고 불현듯 전짓불의 공포(이청준, 1971)가 엄습한다. 과연 전짓불 너머에는 누가 서 있을지 잘 살펴야 한다. 전쟁 중에서는 내전이 가장 참혹하다고 한다(투키디데스). 중재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충 그까이꺼 식의 타협은 없다. 내전은 불신을 만들어내며 싹에 이어 뿌리까지 잘라내게 만든다.

나는 분리주의를 혐오한다. 나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다. 나는 이데올로기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한국은 마치 이념을 대립각으로 좌로, 우로 나뉘어 싸우는 양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형식적으로만 그렇다. 형식논리로 나는 좌파요, 우파요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나. 그런 식이라면 어느 쪽도 지지할 수 없다.

현대 민주사회에서 다원주의는 포괄적 교리의 하나다. 이 사회에서 공존하기 위해서 관용은 필수 덕목이다. 만약 내가 무브먼트를 좋아한다고 해서 MP올스타의 팬들을 인정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념적 층위까지 올라가면 얘기는 조금 달라질 필요가 있다.

이념적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나의 궁핍, 패배, 나의 피착취, 소멸 등을 전제, 필요조건으로 생존할 수 있는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을까. 어불성설이다. 쥴리엣을 사랑했던 로미오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애시당초 나를 착취함으로써만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과 사랑할 수 있냐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자신의 소멸을 긍정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가 정치적 지평을 가지는 것 또는 가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권리 위에 잠자며 정치 따위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욕할 자격도 없다. 나는 때로 분열된 자아를 가진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한다. 이문열, 김현 등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기도 하며 민주노동당에 비판적 지지를 보내기도 한다. 분열된 사회에서 스포와닝 된 나는 필연적으로 자아분열을 피할 수 없는 겐가.

반드시 어느 쪽이기를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러한 이분법적 대립구도는 맑스의 논리에 의하면 당연하다. 맑스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도덕적 우위를 ‘계급적, 구조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를 비판한답시고 이타적인 자본가와 이기적인 노동자의 예를 드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좌/우나 진보/수구, 이념적 구분과도 같은 형식적 편가르기를 뛰어넘어서 이런 사고실험을 한 번 해보자. 그러니까 이념적으로 대립을 하는 사람들 말고 그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이념과 이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의 흐른다. 강 한 편에는 ‘다 같이 잘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또 다른 한 편에는 ‘혼자서만 (넓어야 가족, 친지 정도) 잘 살면 그게 잘사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서있다. 이 둘이 화해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아싸리 이것은 도덕적 가치관의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