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변협의 테러방지법 검토 의견 발표에 대하여

대한변협이 2016. 2. 24.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안(일명 ‘테러방지법’)에 대한 찬성 의견을 국회에 전달하였다고 한다.

조선일보는 위 사실을 보도하면서, “변협이 민변이나 시변과 같은 정치 성향이 강한 단체와 달리, 국내 개업 변호사라면 반드시 가입해야 하는 유일한 법정(法定) 변호사 단체이고, 회원 규모는 2만명에 이른다”, 며 대한변협 의견이 갖는 무게감에 대하여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법률안에 대한 대한변협의 검토의견은 그 무게감에 걸맞게 결코 가볍게 발표되어서는 안 된다. 대한변협 회칙에서 법률안에 대한 대한변협의 의견 발표를 ‘이사회 의결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취지라고 생각된다(대한변협 회칙 제5조 제1항, 제20조 제4호).

대한변협이 의견을 발표 때마다 매번 회원 변호사 전원의 의견을 수렴하거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위와 같은 절차를 회칙으로 정한 것이다.

그런데 대한변협의 2016. 2. 24.자 테러방지법에 대한 검토의견이 위와 같은 내부 절차를 준수하지 않고 발표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통상 법제에 대한 의견은 대한변협 법제위원회에서 의견서를 작성한 뒤 상임이사회를 통해 의결되는데, 이번에는 법제위원회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긴급회의’를 통하여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변협의 한 관계자는 이번 테러방지법 검토의견 발표가 통상적인 절차가 아닌 긴급회의를 거치게 된 이유에 대하여 “중요하고 시급한 사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답한 모양이다.

나는 이 세상에는 절차적 정당성을 포기할 정도로 중요하고 시급한 사안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매우 관대한 사람이다. 살다보면 급박하고 명백한 위험이 현존하는 극히 예외적인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

동시에 나는 이번 사안이 중요하다는 평가에 동의한다. 테러방지법이 제정되면 대한민국 국민의 기본권에 중대한 제한이 가해질 수 있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벌써 나흘째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으로 법안의 본회의 상정을 저지하고 있고, 국민들도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반면, 이번 사안의 시급성에 대하여는 대한변협 관계자와 견해를 달리한다. 대한변협이 정상적인 절차를 생략하고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의견을 발표할 정도로 이번 사안이 시급하였다고 판단한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중대한 것이 곧 시급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번 사안은 그 중요성과 화제성에 비추어 볼 때, 시급함에 쫓기기 보다는 법률가의 몇 안 되는 미덕 중 하나인 신중함을 발휘하여 최대한 면밀하게 검토하였어야 하고, 발표 여부 및 시기 역시 매우 신중하게 결정되었어야 한다.

(어떠한 의견 발표가 시급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판단은 대중 여론의 향방과 관련한 지극히 정치공학적인 카테고리에 속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대한변협이 테러방지법 제정을 이 정도로 시급한 사안이라 판단하고 있었다면, 국회 본회의에서 여-야 간 첨예한 대립이 있기 이전에 입장을 정리하고 발표를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의견 발표 이틀 전인 2016. 2. 22.에도 대한변협 상임이사회가 있었는데, 이때는 왜 논의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정황들을 종합하면, 결국 2016. 2. 23. 오후부터 시작된 ‘필리버스터 정국’의 소용돌이에 대한변협이 휩쓸렸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이번 사안 이전에도 대한변협은 법률안에 대한 의견을 발표해왔다.

법률 전문가를 자처하는 변호사들이 법률안에 대하여 검토의견을 발표하는 것 자체를 두고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번처럼 노골적인 특정 정당 편 들어주기식 의견 발표는 지금까지 대한변협 이름으로 발표된 법률안 검토의견에 대한 얼마 없는 신뢰 마저 모조리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 어쩌면 일반 대중의 법률가에 대한 신뢰는 이미 바닥난 상태라서 더 잃을 것이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도둑 뇌사 사건

법원의 판결에 대하여 언론이 보도하고, 국민들이 그에 대한 의견을 가지면서 ‘법 감정’을 형성하고 ‘사회통념’을 조정해가는 과정은 우리 사회의 법치주의 성숙을 위하여 바람직한 것이다. 사법권력의 정당성도 주권자 국민으로부터 발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헌법은 국민주권주의를 천명하고 있다. 2008년 시행된 국민참여재판 역시 ‘사법의 민주적 정당성과 신뢰’를 높이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나, 이 과정이 언론의 입맛에 따라 좌우되어서는 곤란하다. 온라인 상에 공개된 판결문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당해 법관의 사실인정과 법리 적용에 타당한 면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일부 언론은 그 결론만을 따로 떼어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보도행태에 기존의 사법 불신이 더해지니, 판사들은 일반 국민 법 감정과 동떨어져 있다, 라고 하는 비난 여론이 형성되는 것이다.

형사재판이 피고인의 범죄를 입증하려는 검사와 이에 대한 피고인 측의 방어라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진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재판의 결론이 오롯이 법관만의 몫이라고 볼 수도 없다. 법관도 제출된 증거에 따라 합리적으로 사실을 인정하려 애쓸 뿐이다. 그렇다고 이를 몰라주는 국민 여론을 탓할 수는 없다.

“정의는 행해져야 할 뿐 아니라 보여져야 한다.” 국민의 신뢰를 얻는 것은 결국 사법부가 해야할 일이다. 확정된 형사 판결문을 공개하는 제도가 작년부터 시행되었으니, 점차로 불신이 해소될 여지가 있기를 바란다. 더하여, 이 사건이 국민참여재판의 대상사건이었다면 법률가가 아닌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과연 어떠한 평결을 내렸을지 궁금하다. 지금 인터넷 상의 지배적 여론과 같을까, 다를까.

절도범인 피해자가 뇌사상태에 빠지자 나날이 쌓여가는 병원비가 부담이 되었던 그의 친형은 자살을 하고만다. 피고인은 군 입대를 앞둔 20대 청년인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졸지에 징역형을 살지도 모르는 신세가 되었다. 이 한 사건에 담긴 여러 비극들이 가슴을 친다.

청소년노동인권교육 ‘빵과 장미’ 강사 참가기

켄 로치의 <빵과 장미>

켄 로치 감독의 <빵과 장미>를 본 적이 있다. 인텔리로 보이는 한 남자가 한 히스패닉 여성 노동자가 만나 사랑에 빠지는 영화…, 가 전부는 아니고, 이 만남을 통해 건물 청소 일을 하는 히스패닉 여성 노동자가 ‘노동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은 영화.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들이 건물에서 벌이는 유쾌한 투쟁에 공감할 것이며, “사람들이 우리를 투명인간 보듯이 한다.”라고 하는 말에 가슴이 아릴 것이다. 남자 화장실에 대걸레를 들고 성큼 들어오는 여성 청소노동자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하는가? 마치,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대한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됐다.

이 영화의 제목인 ‘빵과 장미’는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고, ‘장미’도 있어야 그것이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는 점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먹는 문제만 해결되면 만사 무탈한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건물을 청소하는 노동자도 사람이다! 이게 이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이다.

청소년노동인권교육, ‘빵과 장미’

충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공익인권법학회에서 처음 시작한 청소년노동인권교육도 ‘빵과 장미’란 이름을 갖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재단법인 동천의 제1회 공익·인권활동 프로그램 공모전에서 우수팀에 선정되기도 했다(2011.5.14).

2011년 여름, 전국 법학전문대학원 공익인권법학회 및 사법연수원 인권법학회 연합모임인 [인:연]에서 이 ‘빵과 장미’ 프로그램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로 했고, 2012년 5월 1일에는 서울시교육청과 업무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 협약에 의해 서울시교육청은 청소년 노동 인권 교육 강사 양성에 들어가는 실비 지원과 교육 대상 고등학교 선정을 돕는다.

나는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열린 청소년 노동 인권 양성 워크샵에 참가했고(2012.5.12), 선일이비지니스고등학교에서 행해진 교육에 보조교사로 참가했다(2012.7.12). 주교사 1명에 보조교사 5~6명 정도가 각 모둠을 맡아 교육 진행을 돕는 형식이었다.

교육내용은 최저임금, 근로계약서, 산업재해 등에 대한 일반적인 것인데 생각보다 학생들의 관심도가 높고 참여도 적극적이어서 필요에 의한 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인지에 대해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3학년 학생들의 교육을 보조했는데, 내가 맡은 모둠의 반 수 이상이 여름방학을 마치면 바로 취업을 한다고 했다.

부러진 화살 (2012)

“부디 당신이 재판받고 싶은 그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재판하라.”

2007년에 개봉한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다>(수오 마사유키 作)의 엔딩 크레딧에 등장한 법언(法言)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지하철 성추행범으로 기소된다. 프리터(freeter) 족으로 지내던 그는 어렵게 어렵게 구직 면접 기회를 얻게 되었고, 면접에 늦은 나머지 급히 서두르다 지하철 문에 자켓이 끼고 만다. 그리고 이 자켓을 빼려다가 치한으로 오해받는다. 관객은 이 억울하고 착하게 생긴 남자가 완전히 결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죄가 있다면, 오얏나무 밑에서 갓 끈을 고친 정도이다. 그러나 재판은 시종일관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흘러간다.

유능한 변호인들의 조력을 받으며 2년 간 모두 10번의 공판을 겪었지만, 결국 유죄를 선고받은 주인공은 재판장의 징역형 선고를 들으며 이런 독백을 남긴다:

“나는 어쩌면 가슴 깊은 곳에서는 판사를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판사만은 나 자신의 무죄를, 결백을 알아줄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이 판사의 판결이 맞는지, 틀린지는 대체 누가 판결하는가? 오로지 행위를 한 나 자신 만이 판단할 수 있다.
나는 분명히 안다. 저 판사는 틀렸다. 진실에 접근하지 못했다. 나는 하지 않았다.
나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주인공은 정말로 죄가 없을까? 혹시 주인공과 감독과 공모하여 관객을 속인 것은 아닐까?

여기서, 또 한 편의 일본영화, <라쇼몽>(1950, 구로사와 아키라 作)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도 “누가 범인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한 남자가 살해당하고, 그 남자의 아내도 강간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천만 다행으로 사건의 목격자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 목격자의 진술이 아내의 진술과 또 다르다.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진실을 알기 위해 무당을 통해 원혼까지 불러내지만, 이 원혼이 하는 얘기는 또 다르다. 이처럼 기억은 주관적이다. 명백하고 단일한 진실이 존재하는 세계란 환상에 가깝다.

‘석궁 사건’을 다룬 <부러진 화살>(2012, 정지영 作)로 가보자. 이 영화, 사법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껄끄럽고 어쩌면 억울하기도 할 정도의 작품이다. 프레임 자체가 김 교수와 박 변호사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 영화가 ‘사실에 가깝다’라고 하는 것은 주로 법정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그 정도로도 충분히 문제적이다. 반면, 법정 밖의 내용은 당연히 허구가 가미되어 있다. 영화라는 매체의 힘은 바로 이 허구마저도 사실처럼 보이게 하는데 있다. 영화적 진실과 실체적 진실을 혼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편향성이야 말로 영화의 매력이다.

‘국민배우’ 안성기가 연기한 ‘김경호 교수’는 “꼴통”이지만 이성적인 원칙주의자로 그려진다. 그는 자기 자신을 “사회가 합의한 원칙”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자라고 소개한다. 수학 교수답게 “법은 수학처럼 모순이 없기에 아름답다”라는 말까지 한다. 법정에서 직접 법조문을 찾아가며 자신을 변론하는 모습이나 구치소 내에서 꼿꼿하게 생활하며 공들여 서면을 작성하는 모습, 과거 학교의 불의에 불복하여 출제오류를 밝혀내는 모습 등을 보면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런데 그런 김 교수와 판결에 불복하여 석궁으로 판사를 위협하고, 우발적이든 고의든 석궁을 발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사람과 동일인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영화의 시선은 전적으로 김 교수와 박 변호사 그리고 다른 사법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본 법정에 머물러 있다. 애초에 이러한 의도로 제작된 영화다. 이 영화에는 김 교수의 공판이 끝나면 항상 모여 밥과 술을 나누어 먹는 이들이 등장한다. ‘사법 피해자’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사법 피해자들은 판결에 대한 억울함을 넘어 재판과정에서 가슴에 사무치는 부당함을 이기지 못해 평생을 싸우는 사람들이다. 『부러진 화살』의 원작자 서형이 쓴 『법과 싸우는 사람들』을 보면 이들이 자세히 소개된다. 사법부는 피해자를 구제하고 이로써 정의를 바로 세우는 기관인데, 사법부로부터 생겨난 피해자라니 아이러니다.

편향성은 영화에서는 미덕이겠지만, 재판에서는 죄악시 되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 박 변호사는 사법부가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김 교수를 법치주의를 위협한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엄히 처벌하기로 결의한 사실을 지적한다. 마치 이 영화가 한 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처럼, 사법부도 밥을 먹기도 전에 밥상을 한 쪽으로 기울였던 게 아니냐는 날선 비판이다. 이후 진행되는 공판 과정을 보면 이런 의심을 거두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따라가다 보면 관객 자신도 ‘잠재적 사법 피해자’라는 인식을 떨치기 힘들다.

이 영화가 ‘제2의 도가니’라는 이름을 얻으며 논란의 중심으로 올라서자 당시 재판에 관여했던 이들은 물론이고 여러 지식인들이 이 영화에 대한 평론을 내놓고 있다. 공통된 결론은 이 영화, 꽤 볼만하다는 것이다. 이정렬 판사는 “법원가족들이 이 영화를 꼭 보고 많은 생각을 하기 바란다”며 추천했다. 나 역시 법원 관계자들이 이 영화를 보고 이 영화의 기울어진 시각에 대해 억울함을 느끼길 바란다. 그리고 바로 그 감정이 적지 않은 수의 사법 피해자들이 법정에서 느낀 바로 그 감정이라는 사실도 언젠가는 알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