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代表, 섬김

쉽게 대표, 대표 말은 하지만.. 그 ‘대표’라는 말은 쉽게 쓰여서는 안될, 매우 무거운 말이다. 누구나 가지는 개인의 책임 위에 다른 이들의 책임을 조금씩 더 얹은 말이기 때문이다.

무릇 대표라는 자는 남의 고민을 나눠가져야 하고, 남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게 결국은 자기가 뭘 해보겠다고 앞장서는 모양새가 되지만, 일의 순서 역시 대표라는 자가 기획을 하고 홍보를 하고 참여를 독려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목적 자체는 역순으로 내려온다.

다른 어떤 이를 대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표와 대리인은 같은 점은 딱 하나. 둘 다 주인을 두려워한다는 것. 나머지는 거의 다 다르다. 대리인은 주인이 시키는대로 또는 하지말라는 대로만 따르면 된다. 주인 보기에 잘 못한다 싶으면 바로 갈아치워진다. 그건 복종이지 섬김이 아니다.

선출되는 대표는 자신을 선출해 준 이들을 ‘주인’이라 생각할 필요도 없고 복종할 필요도 없고 특정한 계약 관계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대표’라는 자는 그들을 ‘주인’이라 생각하고, 섬겨야 한다. 남을 섬긴다는 것.. 그 사람을 위해 그 사람의 뜻을 헤아리려고 노력한다는 것..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다.

요즘에는 ‘대표’보다 ‘리더’라는 말이 훨씬 더 많이 쓰인다. ‘리더’는 말그대로 누군가를 이끈다는 뜻인데, 아니 근데 누가 따라간댔나? 누군가를 ‘리더’로 뽑아주는 사람 마음은 그렇다. 적당히 대접하고, 응해줄테니, 귀찮은 일 고된 일은 네가 다 알아서 하면 좀 안되냐.. 이게 사람의 본성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계속 그게 반복될 뿐이다.

‘섬기는 대표’는 자신을 뽑아준 이들과 함께 변화하길 원하는 사람이다. 두려움 때문에, 일신의 안위가 걱정되어, 나서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대신해 자신의 안정을 내던지고 당당히 거리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이다.

남을 대표하는 자가 꼭 길눈이 밝을 필요는 없다. 반드시 수학 문제를 잘 풀 필요도 없고 외국어 구사능력이 뛰어날 필요도 없다. 제일 중요한 ‘섬기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선거 캠페인 때만 시장 바닥에 나와서 열심히 하겠다며 ‘섬기는 척’ 하는게 아니라, 자신이 대표하는 이들의 권익과 목소리를 대신하여 내기 위해서는 차가운 길바닥도 마다않는 그런 ‘섬김’이 필요하다.

리더의 자질

‘누구나 리더가 될수는 있지만 아무나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가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리더가 있기 마련이었고, 공동체가 겪는 문제의 원인을 리더에서 찾고자 하는 시도는 인류 공동체 문명의 역사와 함께 했다 해도 과한 말은 아닐 것이다.

정치학은 예전에는 제왕학으로 ‘좋은 리더란 무엇’이고, ‘어떻게 좋은 리더를 만들어 낼 것인가’의 문제와 함께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政體)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었다. 플라톤의 『국가』를 봐도 그러하다. 『국가』는 인간의 ‘좋은 삶’을 보장하는 정치체제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임에 동의하고, 대체 ‘무엇이 좋음인가’에 대한 토론의 결과물이다.

현대 사회에서 리더십 담론은 더욱 활발히 제기되고 있다. 이 담론의 내용은 주로 ‘사회가 어떻게 좋은 리더를 길러낼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해야 좋은 리더가 될 수 있는가’에 맞춰져 있고 이 형식은 ‘자기계발서’라는 ‘신종 자발적 내적 순응 기제’로 나타난다.

나는 이 글에서 ‘리더가 꼭 갖춰야 할 자질’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나는 대개 아래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 리더가 되고, 이런 자질을 잘 갖춘 사람이 좋은 리더가 된다고 생각한다. 아래의 자질을 갖지 않아도 리더가 될 수는 있고, 때로는 좋은 리더라 불리울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 것 같다.

리더가 반드시 갖춰야 할 자질 중 하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다. 이는 그룹 내 구성원의 마음, 그룹 내 구성원 중의 소수 그룹의 마음, 그룹 외 다수 대중의 마음 모두에 해당된다. 사실, 리더십 담론에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 이외의 것들은 그저 리더의 개별성이 빚어낸 다양한 리더십의 제 모습일 뿐이다.

예를 들어 ‘섬기는 리더십’과 ‘군림하는 리더십’, 이 둘 중에 규범적으로 무엇이 더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두 리더십을 발휘하는 리더의 개별성에 그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물론 앞서말한 두 리더십이 ‘좋은 리더십’ 즉, 과정과 결과가 모두 좋은 리더십일 경우라는 것을 전제해야 하겠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과 이를 이해하는 ‘포용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공감력’이 있어야 한다. 공감력이란 곧 다른 사람의 입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감수성을 말한다.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선 이 ‘미루어 짐작함’이 단순한 짐작을 넘어서 어느 정도의 정확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바탕에서 자신의 독특한 인간론을 펼친 사람이 바로 마키아벨리이다. 그는 『군주론』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본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사실 보다 자신의 재산을 빼앗긴 것에 더욱 분노하기 마련”이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피통치자의 재산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가슴 깊은 원한을 살 일은 없을 것”이라 당부한다.

나는 다른 능력들보다 ‘공감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어찌보면 인간학의 최고 단계가 아닐까 싶다. 공감력은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인간들과의 상호 작용 경험을 통해서 배양된다. 이 공감력은 자연히 ‘의사소통능력’과 맞닿아 있다. 신호를 분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신호를 언제나 합리적으로 이해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 한 인간이 공감력을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더 열리어, 많은 사람을 직접 겪어봐야만 한다. 이런 담금질의 과정에서 지치지 않으려면 공동체와 인간에 대한 강한 애정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리더의 자질을 거론하며 리더의 필수 덕목처럼 얘기되는 ‘비전’을 얘기하지 않은 것은 의아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비전은 2차적인 문제이다. 매력적인 비전을 제시하여 이에 대한 그룹 내 구성원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지만, 결국 이 비전을 구체적인 기획과 실행으로 옮겨내는 과정에서야말로 리더십이 빛을 발휘하는 것이다. 또 비전은 늘 상황에 따라 쇄신되는 유동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비전 그 자체보다는 비전을 합의하는 능력 또는 비전을 구성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

훌륭한 리더, 좋은 리더는 공동체를 이롭게 한다.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을 이롭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과 함께 일하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 성취에 사로잡힌 리더와 함께 일하게 된다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고 오히려 책임 회피에 급급한 리더와 함께 일하게 된다면, 진정성이 없는 칭찬을 남발하며 칭찬을 해야 할 상황에서는 오히려 회피하는 리더와 함께 일하게 된다면, 그 일의 결과야 어떨지 모르는 일(일의 결과란 때때로 신의 장난이 결정짓는 경우가 있으므로,)이지만 함께 일하면서 행복감을 느끼긴 힘들 것이다. (작성: 2006. 11. 11. / 수정 2007. 5. 9.)

공동체가 성공할 수 있는 두 가지 비결

한 가족과 세 명의 젊은이가 경북 청송군에서 한집 살림을 시작하기로 했을 때의 일이었다.작은 크기의 공동체가 시작되는 셈이었다.

그 일을 곁에서 도왔던, 충북 괴산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김윤칠이 그 소식을 장일순에게 전하며 어떻게 하면 그들이 뜻을 이뤄가며 화목하게 잘 살 수 있을지를 물었다.

“나 같은 건달이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

장일순은 웃으며 이렇게 운을 떼고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는 얘기를 할 수 있겠지. 여럿이 모인다면 깃발이 있을 것 아냐, 어떻게 가겠다는?

그 깃발 아래 모였으니 깃발을 중심으로 해야 할 테지만 깃발을 너무 앞세울 때는 함께 가는 사람 가운데 늦게 일어난다거나 일을 게으르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무라기 쉽지. 미워하는 마음이 일기 쉽다는 거야. 그럴 때는 말이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어깨동무를 해서 일으켜세워 같이 가는 마음이 중요해.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하다 보면 일이 이뤄질 것 아냐? 크든 작든 공이 생긴단 말이야. 그때 그건 내가 잘해서 그렇게 됐다 하지 말고, 같이 가는 사람들 공이다, 이렇게 공을 남에게 넘기라는 거지.

이 두 가지를 지키면 되지 않을까 싶네.”

― 최성현, 『좁쌀 한 알』(2004), p.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