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게임

어릴 적에 아버지랑 삼성겜보이로 남극탐험, 요술나무 엄청 했었다. 새벽에 화장실 가려고 깼는데 티브이에서 불이 새어나오는 것 같아서 봤더니 일 끝내고 들어오신 아버지께서 패드를 쥐고 열심히 펭귄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고 계셨던 게 기억이 난다. 대구 교동시장엔가 가서 레고도 사고, 사온 날 밤에는 일찍 자라고 하시는 부모님 눈을 피해서 밤새 레고를 만들고 또 허물고 했던 기억도 난다. 게임, 놀이는 인간의 유적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가족의 추억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어머니의 공감력(?)

그저께 대구에 도착하자마자 우연히 한 회식 자리에 따라갔고(소고기 먹는다는 얘기에 꾀임), 그 자리에서 엄청나게 과음을 했다. 급기야 어제 새벽에는 정신을 못 차리고 이리저리 헤매었고 그 대미는 중력을 거스르는 역류 사태로 장식했다.

어제 저녁 밥상머리에서 나의 이 미련한 폭음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글쎄 “한 번씩 그렇게 위로도 빼고 그러면 좋다(?)”라는 도저히 자연의 순리나 건강상식에 맞다고 생각하기 힘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닌가.

당연히 불쌍한 아들을 감싸기 위해서 하신 말씀일텐데, 듣는 나로서도 좀 어이가 없어서 마구 웃었다.

어머니께서 걱정 안 하시게 내 몸 알아서 잘 챙겨야겠다 싶었다. 누군가의 편이 되어준다는 건 이런 것인가 싶다가도.

오늘 부모님께서 서울에 오시는 바람에, ‘공감’ 사례가 하나 더 추가됐다.

서울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대구로 내려갈 채비를 하시던 어머니께서 나를 조용히 부르시더니 아버지 몰래 용돈을 쥐어주셨다.

스물아홉 먹은 아들 체면상 극구 거절을 하였지만 당신이 덜 쓰면 덜 썼지 너는 서울에서 돈이 떨어지면 어찌 하겠느냐 하시며 어여 받으라고 하셨다.

용돈을 받아넣으면서 꼭 필요한 곳에 요긴하게 쓰겠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니 말씀이, 그래 당연히 알아서 필요한 데 잘 쓰겠지 하셨다가, 그런데 돈을 또 어떻게 꼭 필요한 곳에만 쓸 수 있느냐, 돈이라는 게 쓰다보면 쓸데없는 곳에도 쓰고 하는 게 돈을 쓰는 것이지, 그러니까 쓸데없이도 쓰고 그렇게 해라, 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 얘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그건 다 네 어머니께서 너를 깊이 믿으시니까 그러신 거다, 라고 설명을 해주었지만, 나로서는 누군가의 편이 되어준다는 건 이런 것인가 싶다가도.

아무튼 그랬다.

하나에 꽂히면 정신 못 차리는 애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는데, 참 얘가 별 걸 다 기억하고 있어서 놀랐다. 본인 입으로 기억력이 좋다고는 했지만, 나도 기억 못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세세히 설명해주는 걸 듣고 있자니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그랬다.

그 친구가 기억하는 나는 “하나에 꽂히면 정신 못 차리는 애”였다.

“넌 (초등학교) 4학년 때는 만화만 봤어. 심지어 수업 시간에도 계속 봤잖아. 진짜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어. 근데 6학년 때는 컴퓨터에 미쳤지. 그 때도 정말로 이상했어.”

테너를 빌려줘

어제, 대학로에서 봤다.

연극+뮤지컬+오페라, 라는데 그게 말이나 되는 건지…. 그냥 재밌게 봤다. 배우들이 노래를 잘하긴 했다.

무려 4년 전에 무악극장에서 공연할 적 생각이 났다. 아무리 승진을 해도 평생 ‘조’연출일 은영의 연기지도 및 연출에 따라 몇 달을 준비해서 공연을 올렸드랬다.

새 친구도 만나고 평생에 또 없을 듯한 연기 경험도 하고 떠올리기만 해도 나자빠지며 웃음이 터질 재미난 에피소드도 얻었다. 고맙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또 얼마 전에는 귀가하다가 문득 2006년 12월에 중국 하이난에 다녀 온 일이 생각났다. 대뜸 소윤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라삐 야 야 야 라삐 야”를 불렀다.

그런 즐거운 시절을 공유할 누군가가 있기에 참 행복했다.

값진 하루

안산 정상에서는 강렬한 아침 햇살이 짙은 안개를 걷어내고 있었다. 내려오면서 목도 축이고 간단한 체조도 했다.

그러다 서대문구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전도사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수행원 1명과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부지런한 보수를 이기기란 쉽지 않겠군’, 이런 생각을 했다.

기숙사 윗길을 통해 수영장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을 우연히 발견했다. 아니 원래부터 그 곳에 있었지만, 관심으로 다가가지 않았기에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주지 않았다.

방에 돌아와서는 땀이 찬 운동복을 널고 샤워를 했다. 때마침 연락이 와서 함께 아침을 먹고 강의실로 향했다.

날이 좋았다. 연희관 앞에서 또 동문까지 부비적 거리며 걸었다.

날이 참 좋았다. 미안하다 뫼르소. 나는 쬐는 볕에 방아쇠를 당기기 보단, 좀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좀 더 울어보고 싶었고 고통받고 싶었고 녹아내리고 싶었다. 살고 싶었다.

가족 1, 2, 3

가족 1

버르장머리 없던 어린 시절, 내색은 안 했지만 몇 번이고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힘들 때도 나와 누나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언제나 나와 누나 덕에 행복했고, 행복하다고…. 나와 누나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절대적 신뢰는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 주는 끈이 되었다.  (2006. 4. 12.)

가족 2

기나긴 폭풍우를 피해 방주에 탔다.
신께서 말했다.
「대충 4, 5명이 한 조가 되거라.」
「여기는 이 4명이 한 조다.」
억지로 묶인 사람들이므로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해하려고는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약간은 행복해질 것이다.

― 도다 세이지, 「가족」, 『몇 번이라도 좋다 이 지독한 삶이여 다시』 중.

『가족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마을로 : 돌봄과 배움의 공동체』를 읽는데, 위 만화의 내용이 계속 떠올랐다. 억지로 묶인 사람들, 그게 바로 가족이다. 그래서 굳이 없인 못 죽네 사랑하고 그럴 필욘 없다. 다만, 서로 조금씩만 더 이해한다면…. (2006. 12. 25.)

가족 3

가진 것 없고, 보잘 것 없는, 작고 나약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교육에 열성적이었던,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검소한 생활방식과 자신과의 약속에 철저했던, 가족을 최우선으로 돌봤던 부모님 밑에서 자란 것은 내겐 가장 큰 행운이었다. (2007. 3. 17.)

헌혈 그리고 기억

여섯번째 헌혈.

2005년을 마지막으로 약 2년 만이었다. 2006년 한 해는 도저히 헌혈을 할 수가 없었다. 잠을 충분히 잔 적도 며칠 안 되었고, 하루 걸러 술을 마셨기 때문. 올해는 꼬박꼬박 해야지. 그리고 헌혈증은 기부해야지.

오늘 헌혈을 하게 된 것은 사실 크리스피크림 앞을 지나다가, 늘 나에게 헌혈을 권유하셨던 아주머님에게 ‘꽉’ 붙들렸기 때문. 딱히 안 할 이유도 없고 시간도 있던 차라 그 길로 헌혈을 했다. 침대에 누워서 손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잠시 눈을 붙였는데, 그새 머릿 속의 기억이 나를 1년 전 중앙도서관 앞으로 보냈다.

“기억에는 ‘시간’도 소용이 없구나.” 나는 그저 웃음으로 체념하였다. 웃음으로 체념하였다. 그리고 말없이 까딱까딱 거리고 있는 헌혈팩을 바라보았다.

시험기간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을 시험 공부에 투자했지만 정직한 시험 문제 덕분에 답안을 쓸 수는 있었다. 종종 변별력(?)을 위한답시고 치사하게 chronology 따위를 외우게 하는 과목들이 있는데 비하면 매우 모범적이라 하겠다. 결과야 어찌되었건, 일단은 한 과목 해치운 것에 만족한다. 결과야 어찌되었건.

수요일 시험에 도움이 될까 싶어 Kymlicka의 책을 읽고 있는데, 의외로 재밌다. 또 매우 잘 정리되어있다. 준비하는데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험 대비하여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재미있다는 것이 바로 思想 과목의 매력이다. 시험 기간에는 굳이 앞으로의 공부에 필요해서 암기한다기 보다, “혹시 이 부분이 시험에 나올까” 싶은 조바심으로 반복 암기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사상 시험의 준비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도 또한 매력이다.

비 한 번 오고, 기온이 확 떨어졌다. 어제 6층에서 공부하다가 발가락 끝에서 냉기가 느껴지길래 얼른 내려와서 양말을 꺼내신었더랬다. 새벽까지 읽고 쓰고, 잠도 몇 시간 못 잔 탓인지 감기 기운이 마구 올려온다. 눈이 침침하고 머리도 지끈거린다. 주어진 적은 시간 내에 집중해서 중간 시험을 준비하려니, 자연히 따라오는 벼락치기 증후군들. 내일은 시험도 없으니 오늘은 컨디션 조절하는 셈치고 일찍 자야겠다.

시험기간이라 그런지 쓰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2005년 봄학기 마감

파일링에 아직 꼽혀있던, 기말고사 때문에 흩어져있던, 구겨져있던 노트 필기를 주섬주섬 모아서 파일케이스에 넣었다. 워드파일로 남겨져 있는 hand-out이나 study-question 같은 것들은 추려서 버렸다. 그래도 파일케이스가 빠방하다. 다음 학기부터는 좀 더 큰 놈으로 마련해야 겠다.

이 파일케이스를 닫고 드디어 한 학기를 마감했다. 책도 안 만들었고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한 것도 아니었고 운동도 하지 않았고 중간고사 때는 아파서 시험도 거르고 오만가지 일들이 다 있었던 한 학기였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한 학기가 끝났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대해서 초보적인 이해를 하게 되었다. 구조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미드의 사회심리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미진하나마 Marx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맛봤고 Plato의 저작을 읽을 수 있었고 여러모로 고대 아테네에 대한 흥미를 키웠다. 옛날이야기 듣듯 고대 중세 근대 경제사를 배울 수 있었고, 국제관계론을 통해 베스트팔렌부터 얄타까지 현실주의부터 구성주의까지 냉전의 소소한 뒷얘기들까지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남은게 없다 탓할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얻은 것을 붙잡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