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힘든 사람들을 위하여

― 쇼코의 미소(최은영, 문학동네, 2016)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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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엇이 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모두 작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여기서 작가란 그리 거창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삶을 말-글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작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가벼운 마음가짐.

그러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는 정말로 특별한 존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들이 단 몇 개의 문장만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솜씨를 보이면 기가 질린다. 나에게 모국어란 친교적 의사소통의 수단에 불과한데, 작가들은 직접 모국어의 지평을 넓히고 그것들을 풍성하게 가꾼다.

최은영 작가의 정갈한 문장들을 읽으며 마음이 가지런해졌다. 단숨에 읽어내리는 것이 아까워 조금씩 아껴가며 읽었다. 어느 평론가가 덧붙인 글과 마지막의 작가의 말까지 빼놓지 않고 읽었다. 작중 인물들에서 작가의 모습이 읽히기도 했다. 글은 곧 자신의 반영이다.

작가 최은영을 세상에 알린 표제작 「쇼코의 미소」를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 단행본에 실린 다른 작품들을 함께 읽고 나니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이 책에 실린 평론에서도 유사하게 언급되고 있는 내용이다.) 화자는 모두 ‘여자’이고 ‘이성애’는 부각되지 않는다. 어떤 계기로든 ‘죽음’이 이야기 되고, 그것은 우리 사회의 굵직한 사건들(인혁당 사건, 세월호 참사)과 연결되어있다.

그런 맥락에서 「한지와 영주」라는 단편은 이 단행본 내에서 조금 독특한 위상을 갖는다. 지질학을 연구하는 대학원생 ‘영주’가 프랑스 어느 수도원에 체류하면서 케냐에서 온 수의사 ‘한지’를 만난다. 영주와 한지는 따로 만나 자주 산책을 다닐 정도로 가까워지고 사람들과 거리를 둔다는 한지는 영주에게만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영주는 잠시 한지와 함께 하는 삶을 그려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영주와 한지는 뚜렷한 이유가 없이 차츰 멀어진다. 한지가 케냐로 돌아갈 때까지 관계는 회복되지 않는다. 영주의 독백은 한지를 진심으로 아끼고 생각하고 있음을 수 차례 내비추지만 그것은 관객과의 대화에 그치고 한지에게 표현되지 않는다. 영주는 한지를 만난 이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지에 대하여 쓴 일기장을 빙하 속에 담으면서 추억을 봉인한다.

영주와 한지가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과정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 굳이 이유를 찾다면 영주와 한지가 갖고 있는 고유한 ‘성격’ 정도일 것이다. 그 성격에 좋고 나쁨이 있을리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다시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이동하는 것”일 뿐이다. 어떤 식으로든 감정의 잔해는 남겠지만 말이다.

이 밋밋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때 지구상에 외롭게 등장했다가 멸종되었거나 진화하였거나 하여 사라진 생물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담담해졌다. 직접적으로나 소재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쪽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라는 작가의 말이 곱씹어지는 작품이었다.

14 나는 엄마와 할아버지는 작동하지 않아 해마다 먼지가 쌓이고 색이 바래가는 괘종시계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변화할 의지도,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서 멈춰버린 사람들이라고.

24 나는 쇼코가 조금 미워져서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그리웠었다는 그 말에 눈물이 났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25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쇼코가 내게 편지를 하지 않을 무렵부터 느꼈던 이상한 공허감. 쇼코에게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정신적인 허영심.

31 당시의 나는 쇼코가 너무 쉬운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스물세 살에 벌써 직업을 정하고 태어난 소읍에서 떠나지 못한다는 건 형편없는 선택이라고.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겁하게도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이상한 오만으로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그때는 나의 삶이 속물적이고 답답한 쇼코의 삶과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하루하루가 생생한 삶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33 그래서 꿈은 죄였다. 아니, 그건 꿈도 아니었다.
영화 일이 꿈이었다면, 그래서 내가 꿈을 좇았다면 나는 적어도 어느 부분에서는 보람을 느끼고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지 감독이 되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다. 나 자신도 설득할 수 없는 영화에 타인의 마음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건 착각이었다.

34 꿈. 그것은 허영심, 공명심, 인정욕구, 복수심 같은 더러운 마음들을 뒤집어쓴 얼룩덜룩한 허울에 불과했다. …
순결한 꿈은 오로지 이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이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영광도 그들의 것이 되어야 마땅했다. … 재능이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울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먹어간다.

47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걸 사내답지 않다고 여기며 깔보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가끔씩 그런 통제에도 불구하고 비어져나왔던 사랑의 흔적들이 있었다.

89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114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그런 태도가 서서히 그들의 사이를 멀게 했고, 함께 살았던 시간 동안 쌓아왔던 마음들도 더 이상 그 관계를 지탱해주지 못했다.

129 나는 언니의 말에 동의했다. 언니의 목소리에 실린 분노에 가까운 두려움은 나의 오래된 주인이었으니까. 그 두려움은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나를 추동했고 겉보기에는 그다지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 어른으로 키워냈다.

130 우리는 깨끗하게 갈라섰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지막은 그렇게 깨끗할 수 없었기에 그 이별은 우리 사이에 어떤 사랑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우리는 그저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이동했을 뿐이었다.

276 이 책 전체를 통해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서사를 감싸고 있는 순하고 맑은 힘이다. 그 힘은 이를테면 열기라기 보다는 온기에 가까워서 힘보다는 기운이라고 함이 좀더 적절할 수도 있겠지만, 비유하자면 그 힘은 추운 겨울에 따뜻한 실내로 들어갔을 때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온기와도 같다.

277 그러니까 최은영 작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거칠고 단단한 것만이 아니라 순하고 맑은 것도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291 서른 살 여름, 종로 반디앤루니스 한국소설 코너에서 서 있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나는 안 되는 걸까, 한참을 서서 움직이지 못하던 내 모습을.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삶은 멀리 있었고, 점점 더 멀어지는 중이었다.
… 글을 써서 책을 내고 작가로 살아가고 싶었지만 포기할 시점이 왔다고 생각했다.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펑펑 울었던 적도 있다. 오래 사랑한 사람을 놓아주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울었다.

292 십대와 이십대의 나는 나에게 너무 모진 인간이었다. 내가 나라는 이유만으로 미워하고 부당하게 대했던 것에 대해 그때의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293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쪽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 길에서 나 또한 두려움 없이, 온전한 나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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