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슬로운 (2017)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그러면서 자기 앞가림까지 철저하게 하는 로비스트 엘리자베스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 분)의 이야기이다.

일은 완벽에 가깝게 처리하지만 불면에 시달리고 자주 약을 찾을 만큼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 호텔에서 남자 에스코트를 불러서 관계를 갖는 등 사생활도 깨끗하지 않다.

그런데 이런 인간적 결함들 때문에 이 로비스트가 내면적으로 무너진다거나, 갑자기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개관천선한다거나 하는 일은 다행히 없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그 냉혈한 캐릭터로 쭉 밀고 나간다. 그렇게 드라마를 완성한다. 그 점이 정말 좋았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본 것이 다행이었다. 잘 짜인 각본에 세련된 연출. 정말 몰입하면서 재밌게 봤는데, 미국이고 한국이고 흥행참패였다고.

<하우스 오브 카드> 같은 정치드라마를 좋아한다면 무조건 재밌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2016)

스타워즈 전체 시리즈를 놓고 보면 희망의 씨앗이 뿌려지는 시기이지만 이 영화만 놓고 보면 슬프디 슬픈 우주 서사.

이후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행성 하나를 파괴할 수 있는 가공할 위력을 가진 ‘데스 스타’가 어찌 저항군의 전투기 몇 대의 침투로 박살이 날 수 있었던 것인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영화이다.

전쯔단(甄子丹)이 제다이로 나오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고 봉술 잘 하는 맹인 사이비 포스교 신자로 나온다. 제다이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스타워즈라니, 그런데도 재미있다니.

라라랜드 (2016)

배우를 꿈꾸는 여자와 재즈 뮤지션을 꿈꾸는 남자가 LA에서 만나 사랑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꿈을 이루려 노력하면서 어쩌고저쩌고 한다는 이야기.

결국 여자는 자신의 꿈을 이루고, 남자도 자신의 꿈을 이루는데, 이 둘의 사랑은 과연 이루어질 것인가 말 것인가. 사실 뻔한 이야기인데, 지루하기는 커녕 널리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잘 풀었다.

영상과 음악은 덤이다.

마지막 짧은 회상 또는 공상 장면은, 아니, 갑자기, 왜?, 연출의도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필요한 장면은 아니었겠지만, 영화 전반의 톤에 비해 너무 튀는 것은 또 아니라서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히든 피겨스 (2016)

미국과 소련이 이른바 우주 경쟁(Space Race)을 하던 1960년대 당시 미국의 흑백 인종차별이 얼마나 치사하고 추잡하 뻔뻔한 짓거리였는지 알 수 있는 영화.

학교를 나누고 버스를 나누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었는데, 화장실을 나누고 (하긴 학교와 버스를 나누는데 화장실을 같이 썼겠어?) 커피포트를 나누다니. 내 치사하고 더러워서 정말.

실제 미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하였던 흑인 여성 세 명이 주인공. 이 세 주인공은 시종일관 멋지다.

제일 멋진 장면은 새로이 도입되는 IBM에 대응하기 위해 포트란을 공부하는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 분)이 공립도서관에 갔다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나면서 포트란Fortran 교재를 몰래 훔쳐나오는 씬이다.

같이 도서관에 갔던 아들이, 엄마 책을 훔치면 어떻게 해요, 라고 따지자, 나는 세금을 냈고 이 책은 내가 낸 세금으로 산 것이니 훔친 것은 아니다, 라며.

케빈 코스트너나 글렌 파월이 맡은 역 같이 일부 인물을 제외하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백인들은 죄다 인종차별이나 하는 덜떨어진 못난 인간들로 보인다.

그땐 다 그랬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습이 덜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혹성탈출: 종의 전쟁 (2017)

한 시리즈가 끝이 났다. 이렇게 진한 감동이 지속되는 영화는 참 오랜만이다.

이 리부트 3부작은 결국 침팬지 영웅 ‘시저’의 일대기이자 인류멸망사라고 할 수 있다.

문명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는데도 서로 쌈박질이나 하는 인간 무리들을 보면 결국 인류가 멸종하고 서로를 위해 협력하고 때로는 희생하는 유인원들이 살아남는 미래가 참 다행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좋은 유인원은 죽은 유인원 뿐이다!”(The only good apes, are dead apes!)라는 문구는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유인원들이 “좋은 인간은 죽은 인간 뿐이다!”(The only good human, is a dead human!)에서 따온 것이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2014)

역시 재밌다. 한 시리즈의 팬이 되면 어지간한 흠은 다 눈감아 줄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전편에서 시저를 비롯한 유인원 무리가 숲으로 들어간 사이 인류는 ‘시미안 플루’의 확산으로 인해 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유인원과 인류가 평화적 공존을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였지만, 끝내 전쟁으로 치닫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액션은 약하지만 프란스 드 발이 쓴 «침팬지 폴리틱스»가 연상될 정도로 세밀한 정치드라마가 그려진다.

택시운전사 (2017)

서울 사는 택시운전사 김아무개의 눈으로 본 80년 광주. ‘서울에서 외신기자를 태우고 광주를 다녀갔던 택시기사가 있었다.’ 이 한 줄로 시작되는 꽤 괜찮은 한국현대사 부교재.

다만, 영화적 연출이라고 넘어가기에는 지나친 몇 장면(광주 대학생으로 분한 류준열이 어설픈 전라도 사투리로, 아따 그럼 내가 노래 한 곡조 뽑아보겄소잉, 하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 유해진 등 광주 택시운전사들이 자동차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 등)은 꼭 그렇게 만들어야만 했는지.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2016)

책을 읽고 나니 이 소설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를 알겠다: 짧다. 간결하다. 읽기 쉽다. 그러니 많이들 읽고, 또 많이들 언급한다.

내 얘기 같고, 내가 아는 사람 얘기 같다. 그만큼 소재가 평범하다.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서 이미 읽은 적이 있지 않나 싶을 정도이다. ‘아, 이렇게도 소설이 되는구나.’ 게다가, 올 상반기 가장 많이 팔린 책이라니.

그 소름 끼치는 평범함이 바로 이 소설이 가진 힘이라면 힘일 것이다. 내 주위 독자들이 공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거 내 얘기, 내가 아는 사람 얘기다.’,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가 여기 있다.’

아내와 함께 읽고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혼자 읽었을 때의 감상은 ‘답답해서 미치겠다’ 였는데, 아내와 대화를 나눈 다음에는 그 김지영이 답답할 정도로 침묵하게 된 배경에 좀 더 포커스를 하게 되었다.

‘82년생 김지영’씨는 “더 많은 보상과 기회와 발언권이 주어져야 마땅한 사람”이라는 작가의 말에 동의하면서, 그 보상과 기회와 발언권은 누가 주는 것인지가 궁금했던 나는,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 이 책이 그저 답답한 옛 이야기 정도로 읽힐 수 있기를 바란다.

『욕망해도 괜찮아』 (김두식, 2012)

한 달에 한 번 모이지만 두 달에 한 번 정도 얼굴을 내미는 독서모임이 있다. 선한 눈빛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지적이고 유쾌한 대화를 나눈다.

지난번 모임에서는 김두식 교수의 『욕망해도 괜찮아』(창비, 2012)를 읽었다.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욕망해도 괜찮다니. 당연히 괜찮지 그럼. 욕망이 괜찮고 말고 할 문제인가. 욕망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으면 그때부터 욕망이 없어지기라도 하는가.

그러니까 이 책은 어려서 ‘욕망하면 안 된다’는 계율을 내면화하여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그 가치관에 붙들려 있는(또는 속고 있는) 사람들이나 한번 읽어볼 법한 그런 책인 것이다.

다행히 발제가 재밌었다. 펀치라인은 “모범생 저자는 욕망을 글로만 배운 것 같다.”

그리고 “‘남자란 이렇다, 여자란 저렇다’고 일반화하는 건 늘 위험하고 언제나 틀린 명제지만 … 무식하게 툭 던져본다면, 아무래도 사랑에 자신을 던지는 건 남성보다 여성 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424쪽)라고 쓴 부분에 대하여는, 언제나 틀린 명제를 무식하게 툭 던지지 말았어야 라고.

‘학벌 욕망’을 논할 때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수도권에 위치한 4년제 대학을 졸업하였고 (아마도) 4대 보험이 적용되는 번듯한 일자리(또는 자영업, 전문직)를 가졌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생각이 다양한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지만 정체성의 여러 부분에서는 여전히 동질적이었던 것이고 어쩌면 그 이유 덕분에 공감대가 더 쉽고 넓게 형성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항상 만나는 사람, 나와 비슷한 사람이 주는 편안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해서 이번 일요일에는 또 다른 친구가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에 구경가기로 했다.

프릳츠 커피 컴퍼니

프릳츠커피 다녀오고 생각이 많아졌다.

왜 어떤 카페는 ‘이렇게나’ 잘 되고, 어떤 카페는 파리만 날리다 결국에는 망하는가.

입지? 마포구 도화동이 뜨고 있는 동네라고 하기는 어렵고, 공덕역 가까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거리에 있다. 대로변이 아니고 오히려 같은 블 대로변 건물 1층에 스타벅스가 입점해 있다.

분위기? 확실히 이색적이다. 기계로 찍어낸 듯 유사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느 프랜차이즈 카페들과는 당연히 다르다.

전에는 고깃집이었던 마당이 있는 2층 양옥집 ― 지면에서 0.5층 높게 1층을 두는 이런 건축양식(?)을 일컫는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 ― 을 통째로 사용한다. 반지하에 빵을 굽는 시설이 있고 1층에 계산대, 커피, 빵 그리고 기념품(컵, 모자, 티셔츠 등) 판매대가 있으며 1층 일부와 2층에 좌석이 마련되어 있다.

인테리어 공사를 하다 만 듯 천장과 벽을 그대로 노출했다. 이런 스타일은 이제 새롭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키취적인 느낌은 없다. 오히려, 이런 복고 느낌은 우리가 제일 잘 살릴 수 있다, 하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이게 원래 우리 색이야… 같은? 그래서 가구, 조명 기타 소품의 선택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신감은 계산대와 커피를 내리는 공간을 1층 가운데에 배치하고 아무런 칸막이를 두지 않음으로써 완전히 개방하는 형태에서도 묻어났다. 넓지 않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이기도 했겠지만, 보시려면 얼마든지 보시고요… 그런 것 아니었을까 싶다.

맛? 압도적이었다. 최근 마셨던 어떤 커피보다 강렬한 경험을 선사해주었다. 입구에서부터 진동하는 빵 굽는 냄새에 코가 홀렸다.

커피를 마시는 물개가 그려진 로고. 귀엽지만 의아했다. 커피랑 물개가 무슨 상관이지? 역시 아무 상관이 없었고, 아무 상관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골목마다 카페가 들어서는 이 시대에 프릳츠 커피 컴퍼니는 전에 없던 새로운 존재로 자리매김을 하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이걸 한 번에 다 잘 해내는 카페가 몇이나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