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일기

영화고 드라마고 예능이고 주변에서 먼저 재밌다 괜찮다는 평을 들은 다음에야 보기를 시작한다. 그래야 다 보고 나서 보는데 쓴 시간이 아깝다는 후회를 줄일 수 있을 것만 같아서다. 그래도 아내가 같이 보자고 하는 게 있으면 (공통의 레퍼런스를 늘리기 위해서도) 어지간하면 같이 보는 편이다. 나영석 PD의 신작 tvN 신혼일기 역시 아내와 함께 1화, 2화를 보게 되었다.

강원 인제 어느 산골 외딴집, 나영석 PD의 전작 <삼시세끼>가 자연히 떠오르는 공간적 설정에 구혜선-안재현 부부가 겨울을 나기 위해 하루종일 밥해먹고 먹은 것 치우고 소일거리 하다가 잠들고 이 부부와 함께 지내는 견 또는 묘가 간간이 등장하고 하는 내용이 무어 새로운 것이 있겠는가 싶었는데 마치 전통적 성 역할이 뒤바뀐 듯한 털털한 방구쟁이 구혜선과 솜씨있게 요리하여 이쁘게 담아내기를 좋아하는 안재현, 이 부부가 투닥거리는 모습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긴 하였다.

물론 그 재미가 전부는 아니었다. 바로 2화에서부터 어쩌면 나영석 PD가 이번 신작을 통하여 말하고 싶은 것으로 보이는 장면이 본격 등장한다.

구체적인 상황은 이랬다. 구혜선은 (강원 인제 산골까지 온 마당에) 설거지와 부엌 정리에 정신이 팔린 안재현을 못마땅해하고, 안재현은 (어쨌거나 방송이라는 점을 의식하였기 때문인지) 설거지와 부엌 정리를 해두고 싶어 안절부절 한다. 이 장면까지 본 아내와 나는 의외로 구혜선이 철이 없는 편이고, 안재현이 살림꾼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에 가까웠다. 안재현이 본격적으로 집안일을 분담한 것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혼 직후부터 최근까지 거의 모든 집안일을 도맡았던 것은 (이 땅의 많은 부부들의 모습과 유사하게, 아내인) 구혜선이었다. 구혜선은 안재현에게 당신이 지금 느끼는 그 스트레스와 멘붕이 바로 자신이 결혼 초기에 집안일을 하며 겪었던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이 말을 들은 안재현은 발끈하여 그럼 당신은 나와의 결혼을 후회하는 것이냐(?!), 당신의 말은 마치 우리의 결혼생활이 최악이기만 했다는 것 같다(?!)는 식의 극단적인 반응을 하기에 이른다.

와, 대화가 이쯤에 이르면 일단 팝콘이랑 콜라가 어디에 있더라…, 잠시 진정하고 이 부부의 대화를 계속 지켜보았다. 구혜선은 몹시도 차분하게, 나는 지금 당신이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라고 정리하였고, 이에 안재현은 자신이 구혜선의 말에 뜨끔하여 그만 발끈해버렸다고 자신의 미숙한 반응에 대하여 사과한다. (안재현의 이 사과는 아주 좋았다.) 어느 틈에 자포자기 하지 않고 서로의 변화를 이끌어내서 현재에 이르렀더라도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 부부로구나, 감탄하게 된 순간이었다.

구혜선은 결혼 직후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마치 자신이 집안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 같아서 힘들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설거지 구혜선 100%, 빨래 구혜선 100%, 쓰레기버리기 구혜선 80% (20%는 안재현 따라나옴)”을 내용으로 하는 ‘고발장’을 쓰기에 이르렀고, 안재현은 그 ‘고발장’을 보고서야 집안일 분담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자신의 아내를 “구님”이라 부르고 어지간하면 아내의 뜻에 따르려 하고 요리하기를 즐기는, 얼핏 보기엔 집안일 정도는 착착 알아서 잘 할 것만 같은 안재현에게도 위와 같은 “계도”의 기간이 필요했는데, 부엌에 들어오지 말라고는 안 하셨지만 그렇다고 부엌에 들어오라고 하시지도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기타 집안일로부터 멀어져 이제는 집안일이 낯설기만 한 사람들은 얼마나 갈 길이 멀었겠는가.

전작 <삼시세끼>에서 멋스럽게 기른 수염 덕에 그저 상남자인 줄만 알았는데 요리와 부엌일을 능숙히 해내는 “차줌마”를 등장시켜 주부 경력 30년에 빛나는 우리 어머니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을 감탄케 하고 남자라서 못한다는 건 그저 핑계이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했던 나영석 PD는 이제는 구혜선-안재현 부부를 통하여 맞벌이가 기본이고 외벌이가 예외인 시대의 새로운 부부상을 보여주려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누가 설거지를 더 많이 했니 빨래를 더 많이 했니, 고작 사소한 집안일을 가지고 치사하게 따지고 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사소한 집안일의 치사한 분담에서부터 진짜 부부생활은 시작되는 것이 아닐른지.

글쓴이

Sehee Park

Advocate for Innovators. Law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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