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행복이 한 배를 탈 수 있을까

가난과 행복이 한 배를 탈 수 있을까.

내가 처음 이런 질문을 품게 된 것은 한 권의 책 때문이다. 장 베르뜨랑 아리스티드, 저 이름도 낯선 아이티(Haiti)라는 나라에서 대통령을 했던 사람이 쓴 『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이두부 옮김, 이후 펴냄)가 바로 그 책이다.

가난이라는 두 글자 앞에 ‘지긋지긋’ 또는 ‘진절머리 나는’이 아니라 ‘존엄’이 쓰여질 수 있다는 것부터가 매우 신선했다. 나의 입이 참으로 쉽게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했던 반면, 정작 당시 나의 머리는 가난과 존엄을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분류했던 모양이다.

가난하면 존엄할 수 없는 현실에서 ‘존엄한 가난’이란 말은 매우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게 사실이다. 내 기억에도 그 책을 읽은 뒤에 나누었던 어떤 이와 대화에서도 ‘존엄한 가난’에 대하여 호의적으로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며칠 전 닥터노아치과의 박근우 원장님의 소개 덕분에 인디언플룻과 칼림바를 연주하는 봄눈별님이 쓰신 “자발적인 가난뱅이 ‘백수’로 행복하게 사는 법“을 읽게 되었다. 실천이라는 깊은 우물에서 길어올린 맑고 시원한 글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글쓴이를 상대로 존경 섞인 질투를 품게 되었다.

부를 동경할 이유가 없듯, 가난을 칭송할 이유도 없다. 동시에 둘 다 폄하의 대상도 아니다. 어떠한 조건에서도 자기 삶의 행복은 자신이 찾아가는 것이다. 행복이 물질적 풍요와 절대적인 상관관계를 갖는 것도 아니다. 단지 돈이 많으면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은 행복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다.

도둑 뇌사 사건

법원의 판결에 대하여 언론이 보도하고, 국민들이 그에 대한 의견을 가지면서 ‘법 감정’을 형성하고 ‘사회통념’을 조정해가는 과정은 우리 사회의 법치주의 성숙을 위하여 바람직한 것이다. 사법권력의 정당성도 주권자 국민으로부터 발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헌법은 국민주권주의를 천명하고 있다. 2008년 시행된 국민참여재판 역시 ‘사법의 민주적 정당성과 신뢰’를 높이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나, 이 과정이 언론의 입맛에 따라 좌우되어서는 곤란하다. 온라인 상에 공개된 판결문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당해 법관의 사실인정과 법리 적용에 타당한 면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일부 언론은 그 결론만을 따로 떼어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보도행태에 기존의 사법 불신이 더해지니, 판사들은 일반 국민 법 감정과 동떨어져 있다, 라고 하는 비난 여론이 형성되는 것이다.

형사재판이 피고인의 범죄를 입증하려는 검사와 이에 대한 피고인 측의 방어라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진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재판의 결론이 오롯이 법관만의 몫이라고 볼 수도 없다. 법관도 제출된 증거에 따라 합리적으로 사실을 인정하려 애쓸 뿐이다. 그렇다고 이를 몰라주는 국민 여론을 탓할 수는 없다.

“정의는 행해져야 할 뿐 아니라 보여져야 한다.” 국민의 신뢰를 얻는 것은 결국 사법부가 해야할 일이다. 확정된 형사 판결문을 공개하는 제도가 작년부터 시행되었으니, 점차로 불신이 해소될 여지가 있기를 바란다. 더하여, 이 사건이 국민참여재판의 대상사건이었다면 법률가가 아닌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과연 어떠한 평결을 내렸을지 궁금하다. 지금 인터넷 상의 지배적 여론과 같을까, 다를까.

절도범인 피해자가 뇌사상태에 빠지자 나날이 쌓여가는 병원비가 부담이 되었던 그의 친형은 자살을 하고만다. 피고인은 군 입대를 앞둔 20대 청년인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졸지에 징역형을 살지도 모르는 신세가 되었다. 이 한 사건에 담긴 여러 비극들이 가슴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