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역시 그저께 본 연극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에 대해서 쓰지 않을 수 없겠다.

등받이 없는 계단식 객석. 약 150분에 달하는 공연시간. 그럼에도 빈 자리가 거의 없었고, 관객들의 몰입도가 높았다는 것이 나로서는 신기했다. 관객들은 아마도 제작/출연진의 지인이거나 연극을 아주 좋아해서 자주 보는 사람이거나 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원안으로 했다는 이 연극은 ‘시대비평’이라는 인문사회 계간지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탈바꿈했다. 무려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한국 사회의 말과 글을 담아내며 시대정신을 고민해 온 이 ‘시대비평’에 새 편집장이 오면서 막이 오른다.

과학철학을 과학+철학 정도로 이해하며, 이 ‘시대정신’도 앞으로는 변화하는 흐름에 맞추어 “트렌디” 하게 바뀌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 편집장과 ‘시대정신’ 만드는 일을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며 업으로 삼아 온 김팀장의 갈등이 가장 큰 감정선을 형성한다. (나의 의문: 트렌디하지 않은데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당연히, 편집장이 데려온, 마치 우뚝솟은 산 마냥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디자이너가 이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편집장과 내연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녀는 정말 하고 싶었던 회화를 포기하고 입에 풀칠이라도 할 요량으로 편집디자인을 시작했으나 지금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김팀장의 친구인 박은 이 ‘시대정신’의 독자대표라는 타이틀을 달 정도로 자주 이 사무실에 드나드는 작자이다. “잡종철학자”라는 비아냥을 듣기는 하지만 멋쩍은 웃음을 보일 뿐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나이에 과감하게 방향을 틀어 철학을 다시 전공했고 과거 대학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도 혼자 살아남을 정도로 강단이 있는 사람이다.

여기에 김팀장보다 2년 선배로 사람은 좋은데 어딘가 맹해보이는 류선배, 일을 같이 하기는 하지만 사적인 관계에서는 분명한 선을 긋는 윤선생, ‘시대정신’의 인턴부터 시작한 막내기자로 부지런히 일하며 내심 김팀장의 친구 박을 흠모하고 있는 유경이 등장한다.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성, 급기야 아직도 밖은 겨울이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봄은 “언젠가는 오겠지만 기약이 없는 듯 보이는” 이 상황. 시대가 바뀌어서 더는 사람들이 찾지 않으니 어서 이 성을 벗어나자고 하는 사람과 지금껏 지켜 온 이 성을 앞으로도 지켜가야 한다는 사람.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 이야기는 낯설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익숙하지도 않았다.

극중에서 류선배에 의해 짧게 불러지기도 하는 김광진의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 오늘 밤은 노래해요 모두 즐겁게”로 시작하는 이 노래의 배치가 조금은 의아하다. (어쩌면 연극은 공연으로써 이미 모든 것을 보였기에 그깟 제목의 틀에 내용을 우겨넣는 것은 무의미한 짓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외롭다고 해서 반드시 힘든 것만은 아니고, 힘들다고 해서 당연히 슬픈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외로움과 힘듦, 슬픔은 항상 같이 가는 것은 아니고 셋 다 독립적인 것이다.

편집장은 광고계 경력과 멋들어진 수트의 껍데기를 갖고 있지만 올라갈 일보다는 내려갈 일만 남은 중년으로서, 가라앉는 배처럼 보이는 ‘시대정신’을 책임져야 하는 편집장으로서 다른 누구보다 외로운 사람이다.

반면, 그 대척점에 있는 김팀장은 겨울에 살더라도 곧 다가올 봄을, 아니 작열하는 태양, 인류 시원의 대륙인 아프리카를 갈망하는 뜨거운 사람이다. 비록 처자식이 있지만, 편집장과 함께 온 디자이너에게 마음을 두고 쉴새없이 핸드폰 메시지를 보내거나 박하사탕을 건네는 정열적인 사람이다.

시종 차분함과 여유를 잃지 않으려는 편집장과 달리 사자머리를 한 김팀장은 냉랭한 윤선생에게 앙탈을 부리고, 허허 웃고 다니는 류선배에게 화를 내고, 뭐든 시키는대로 고분하게 따르는 유경을 다그치면서 자신의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비록 청춘을 모조리 바친 ‘시대정신’이 허물어져 가고 있고, 아프리카 아프리카 노래를 불러보아도 그저 벽에다 붙여놓은 아프리카 사진만 줄기차게 바라볼 뿐이지만, 김팀장은 자신이 지켜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기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과감한 몸싸움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 황당한 솔직함이 때론 상대방을 당혹스럽게 만들 수는 있지만, 그래도 뭐 어떤가. 인생을 살다보면 어떤 것들은 정말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것들이 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엄청난 확률 위에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드디어 봄은 오고야 말았고, 김팀장은 ‘시대정신’의 새 편집장이 되었다. 봄이 왔다고 해서 무너지는 성이 다시 쌓아올려지는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는 것처럼, ‘시대정신’의 판매부수가 갑작스럽게 늘어난다든지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출판사 쪽의 예산 지원이 끊기면 당장에 몇 개월도 버티지 못할 거라는 폭언이 무색하게도, 그 외롭고 힘들고 슬픈 사람들은 제자리를 지키면서 꿋꿋이 독자들에게 다음 호 휴간과 정기구독료 잔존액 환급을 안내하고 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라는 간단한 말에 인생을 걸기란 언뜻 무모한 일로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이미 엄청난 확률 위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까 되는지 안 되는지 한 번 해보면 또 어떤가.

20대 중반의 막내 기자로 나오는 유경은 일견 가장 비중도 적고 성격도 없는 듯 보이지만, 다시 바빠진 ‘시대정신’ 사무실에서 가장 많이 호명되는 이름이다. 사실 김팀장이야 이미 발을 깊이 들인 나머지 갈 곳이 없어졌다고 해도 유경은 얼마든지 다른 곳에서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유경이 남았다. 차가운 겨울에도 따뜻한 봄을 꿈꾸며 테이블에 화분을 놓았고, 서먹서먹한 어른들 사이에서 열을 쬔 분자처럼 활발히 움직이던 그 유경이 아직도 이 ‘시대정신’에 남아 편집장이 된 김팀장과 류선배의 부름을 받고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김팀장과 류선배, 윤선생 그리고 유경, 이 사람들이 ‘시대정신’에 남기 위해 개인적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남았다.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즐겁게 노래부르며 내일을 꿈꾼다.

2013-08-22(목) ~ 2013-09-01(일)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김보나, 김유경, 류기산, 박용우, 백석광, 박웅, 정새별
전진모, 윤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