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하 좋았어

아침에 후배 대영이랑 택시를 탔다.

라디오에서 클래식이 나왔는데 대영이가 기사님 수준 있으시다 그랬고 나는 쇼팽인가 모짜르트인가 그랬는데 기사님께서 바하에요 바하! 그러셨다.

민망했지만 좋았어, 바하 좋았어.

리바운딩

요며칠 아니 요 몇주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버로딩.
알아챘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나에게서 나타나는 이상징후 같은 걸 감지하지 못했다.

결국, 사단이 났다.
시험도 망쳤고… 인턴 과제도 못했다.
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나, 싶었다. 이건 아닌데…

어제 5km, 오늘 4km 정도를 달렸다.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나도 그럴 수도 있구나 싶다.
두려웠던 일이 현실화 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 아직 잘 실감이 안 나지만,
그래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달리 수가 없기도 하다. 그냥 받아들일 밖에…

욕심을 줄이고, 여유를 늘려야 한다.
사람, 모임, 일, 경험… 다…

지금은 내 공부에 좀 더 집중할 때이니까,
나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하루에 최소 1~2시간은 나를 위해 정말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멍하니 빈 책상에 앉아서 이것저것 정리하고 궁리를 해보려고 한다.

특히 1주일에 하루 반나절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청소를 깨끗이 하고,
지난 한 주와 다음 한 주에 대해서 차분하게 생각하려고 한다.

차분히… 이건 어렵겠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정리하는 삶을 살고 싶다.
멘붕이 왔었는데 이 정도까지 정리해낸 것도 대단하다.

잘 했어,
잘 했다.

설국열차 (2013)

설국, 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였다. 소설의 첫 장면은, 기차를 타고 터널을 지나니 하아얀 설국이 펼쳐진다, 라는 것이다.

이제 설국 그리고 열차, 하면 봉준호다. 이 영화, 실로 대단하다. 영화관을 빠져나오면서 한 편의 잘 쓰여진 소설을 한 페이지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완독해낸 느낌을 받았다. 간간이 이해할 수 없는 메타포 혹은 설명 되지 않은 장치 같은 것만 빼면 크게 흠 잡을 것이 없었다.

“정시 출발, 정시 도착”을 이상으로 삼는 기차, 철도, 배차시스템은 계획성, 예측가능성, 계산합리성을 핵심으로 하는 ‘근대성’(modernity)의 집약이자 화체(化體)이다. 철도에는 ‘폐쇄계’(closed system)를 가정하고 주어진 변수를 모조리 계산해내면 무엇이든 계획하고 예측할 수 있다고 하는 근대적 이성의 오만함(hubris)이 오롯이 투영되어 있다. 조선 땅의 근대가 철도와 함께 시작했다고 쓰는 문화사가들도 있다.

그렇다고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근대+자본주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은유일 뿐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 미친 롤러코스터에서 뛰어내려라!”라고 하던 탈주의 주문은 예전부터 있어왔는데 그 얘기를 굳이 영화까지 만들어서 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물론 지금껏 이 체제에서 탈주한 이들의 모습은 아예 시야에서 사라져버렸거나 아니면 보이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 죽었거나….

고작 영화 한 편에 괜스레 수다스러워졌다. 영화에서 단 하나의 메시지를 읽어낼 바에야 차라리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이 낫다. 정설에 가까운 해석이 가능한 영화는 오히려 범작에 가깝다. 부디 설국열차라는 텍스트를 보다 다양하게 읽어내는 이들이 있기를 바란다. 물론, 그래봤자 고작 영화 한 편이지만.

그런데, 설국열차, 꼬리칸에서 앞칸으로 옮겨진 바이올린 연주자와 어린 아이들은 왜 꼬리칸 사람들이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을까. 과거야 어쨌건 이미 한 시스템의 나사못이 되어 그에 부역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영화를 보고 나서 읽은 감독 인터뷰.  덕분에 잘 정리가 되었다. 특히 열차 내에서 무엇이 멸종되고 마모되는지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말에 동감한다. 오늘 광화문에서 사람들 사이를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만났다. 위험하고 소란스러워서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장면일 수도 있지만, 그 아이들의 싱싱함과 푸르름이 희망이 아닐까 싶다.

한때 나였던 소년은 어디에 있을까

“한때 나였던 소년은 어디에 있을까
계속 내 안에 남아 있나, 아니면 떠나버렸나
난 결코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 역시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아는지
이렇게 헤어지고 말 것을
왜 우린 그 오랜 세월 함께 성장하며 보냈을까
나의 유년 시절이 스러져갔을 때
왜 우리 둘은 죽지 않았을까
그 영혼은 내게서 떠나갔는데
왜 해골은 나를 뒤쫓아 오는 걸까”

파블로 네루다의 『질문의 책』에 담긴 시였다.

광화문을 함께 걷던 이가 ‘나였던 그 아이’의 행방을 물었다. 분명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을텐데, 나로서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아직 내 스스로가 ‘아이’라는 점이 부끄러웠는지도. 내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이의 존재를 애써 모른척 하느라 힘겨웠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