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은 정말로 아름답다

군에서 알게 된 한 선배가 있다. 그는 꿈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여곡절(迂餘曲折)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주변사람들은 꿈보다는 당장의 현실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인지 그를 미련하게 또 안쓰럽게 보았다. 그가 어서 빨리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듯도 보였다.

내가 보기에도 그가 지금껏 겪은 우여곡절은 모두 그가 꿈을 이루고야 말겠다고 하는 바로 그 미련함에서 비롯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가 멋지게 보였음을 밝힌다. 일단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친절하고 상냥했다. 갓 소위로 임관한 나를 동생처럼 대하며 이것저것 상세히 알려주었다.

그는 나보다 1년 6개월 먼저 전역했다. 전역을 하는 그에게 나는 조종사 선글라스를 선물했다. 몇 해 전의 일이라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내가 메시지를 적었다면, “전역 축하드립니다. 꼭 꿈을 이루세요, 선배님!”이라고 적었을 것이다.

그랬다. 그의 꿈은 하늘을 나는 파일럿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군에 왔던 것이었다.

며칠 전, 그때 이후로 처음 그 선배와 연락이 닿았다. 그 선배는 “세희야, 형 모 항공사 조종사가 되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꿈을 품고,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이는 아름답다. 그리고 끝내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은, 또 얼마나 더 아름다울 것인가!

오랜만에 이 선배의 멋쩍은 웃음이 보고 싶다.

그리고 지금 또 한 번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도전하고 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이종희 회장님

2013. 6. 26. 강남에서 나의 멘토, 이종희 회장님을 뵈었다.

이종희 모다정보통신 회장님은 한국리더십학교의 이사로서 멘토링에 참가하셨고, 나는 한국리더십학교에서 준비한 통일한국 젊은포럼에 참가하면서 멘티가 되었다.

그렇게 멘토-멘티 결연이 된 후 처음 찾아뵌 것이다. 찾아뵌 직후의 나의 소감: “역시 나는 사람 복이 많다!”

나는 멘토링 프로그램이 이름만 거창하고 실속은 없는 일(一) 대(對) 다(多) 형식일 것이라 생각하고 크게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단 한 명의 멘티가 단 한 명의 멘토를 찾아가서 만나는 진짜 멘토링이었다.

내가 찾아뵌 때가 점심 즈음이라 회장님께서 평소 자주 가신다는 백반 집에서 맛있는 식사를 얻어먹었다. 그리고는 회장님 사무실에서 멘토링을 이어갔다.

사실 나는 이 멘토링이 있기 전까지는 이종희 회장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찾아뵙기 전에 인터넷으로 회장님에 대해 간단히 리서치를 했다.

이종희 회장님은 정보통신업계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분이다. 박근혜 정부 미래창조과학부의 초대 장관이 될 뻔 했던 김종훈씨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벨 연구소(Bell Lab)에서 연구원을 역임했고, 한국 공학 한림원의 정회원이기도 하다.

나도 정보통신분야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이 있지만, 공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내가 그 주제로 회장님과 얘기를 이어갈 자신은 없었다.

게다가 회장님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시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하신다. 반면, 나는 카톨릭에서 영세를 받았고 불교철학에 심취해있으며 원불교 수련에 종종 참가하는 다종교인이라 이 부분에서도 크게 자신이 있지는 않았다. (결국 종교 얘기도 나왔는데 회장님께서는 “종교 간의 차이보다는 공통되는 부분을 보아야 한다”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래도 통하는 바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바로 통일과 통일 이후의 한반도 문제였다. 이종희 회장님은 2006년에 평양, 개성, 금강산을 모두 다녀오실 정도로 북한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다. 『북한의 정보통신기술』이라는 책도 쓰셨다.

인재양성에도 관심이 많으셨다. 한국리더십학교의 이사로 계시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생각해본다. 나도 인재양성에 관심이 많다. 나는 장차 좋은 뜻을 품고 정치에 입문하려는 청년들을 돕고 싶다.

많은 책을 쓸 계획에 있는 것도 비슷한 점 중의 하나였다.

자주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다. 학기 중에는 어렵겠지만 방학 중에라도 자주 찾아뵙고 회장님께서 지금껏 살아오신 이야기를 나눠듣고 싶다. 그것이 당장에 무엇에 쓰일 수 있을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회장님을 자주 뵙다보면 그 훌륭함을 닮을 수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품어본다.

이 시대 청년들에게

시간을 꼭 준수하라. 누구와의 약속에서도. 말하기보다 경청하라. 언제 어느 곳에서건 읽을거리를 가지고 다녀라. 작은 것이 모여 큰 힘을 이룬다. 무엇이든 잡지 하나를 구독하라. 흐름을 읽어야 한다. 급한 일이 아닌 중요한 일을 아침마다 실행하라. 회사만이 아니라 나 자신의 우선순위를 설정함이 필요하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항상 메모하라. 메모를 하면 더 잘 기억하고, 쓰레기 아이디어들일지라도 교집합이 되면 가치가 있다. […]

대화 잘 하기

세상 모든 일의 어려움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데에서 온다. 일도 연애도 생존도 번식도… 그래서 인간사 대부분의 문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온다. (물론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서 얻는 이득도 있다.)

말하기가 일방적인 것이라면 대화는 쌍방적인 것이다. 나는 말하기와 대화를 착각한 적이 많다. 대화의 상대방이 나의 말하기를 좋아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나는 ①재미있고 ②좋은 내용을 ③빠르게 ④많이 전달한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입 안에 담아둘 때가 더 낫기도 한 법이다. 이걸 몰랐다. 뜻하지 않은 정적… 때로는 이 대화에 참가한 모두가 그 정적을 짊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정적을 깨뜨리는 건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대화를 즐겁게 유지해야 한다는 나만의 사명감. 그러다보니 실수도 많았고, 어쨌거나 그러한 실수 덕에 그런 정적을 깨고 활기를 되찾는 skill을 배우기도 했다.

‘일 대 다’의 상황에서는 그렇게 내가 물꼬만 터주면 나머지는 물이 흘러가듯 잘 알아서 흘러가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일 대 일’ 상황에서는 상대의 말을 이끌어내지 않으면, [어색한 정적 – 나의 말 – 어색한 정적 – 나의 말…]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

나의 주관이 뚜렷하고 나의 세계가 강하다는 남들의 말이 꼭 감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형식과 외양은 감탄이어서 나의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아, 나는 감탄받고 있구나.’ 그것은 첫 인상에 대한 비평이었을 뿐이다.

아무튼 그러한 감탄의 이면에는 “너는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 혹은 “너는 아마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야”가 숨겨져 있었다.

나도 대화에서 상대방의 말을 그저 듣기만 하고 싶다. 얼마나 편할까… 자문해본다. 상대방의 얘기가 재미없고 따분하고 더는 들어줄 가치가 없다는 강한 확신이 들어도 계속해서 상대방의 대화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겠는가?

상대방의 가치 있는 말을 이끌어내는 건 대화의 또 다른 일방인 나의 몫이라 생각한다. 나는 말하기 skill up만 되어있지, 잘 듣고 잘 반응하여 상대방을 상승하는 대화로 이끌어가기의 기술은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1. 폐쇄형(예/아니오) 질문보다 개방형 질문을 던지는 대화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2. 상대방이 던지는 질문 안에는 이미 꽤 많은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상대의 의도, 기호, 취향이 그 질문에 묻어나기 마련이다.
  3. 대화를 방해하는 것들은 멀리 치워버려야 한다. 소음, 모바일기기…
  4. 매번 새로운 대화여야 한다. 비슷한 얘기를 어디서 들었는데…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본질을 놓쳐버린다. 모든 사람은 그리고 그 사람의 모든 이야기는 특별하고 고유하다.
  5. 상대방이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일종의 듣기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시험에 임하는 자세로 버텨내야 한다.
  6. 나의 말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정성스레 진심을 담아서 내어놓아야 한다. 그러면 적은 말로도 충분하다. 이렇게 아낀 에너지를 귀로 보내서 듣는 일에 써야한다.

나는 아마도 말하는 일로 먹고 살게 될 것이고, 그러려면 말하는 시간 만큼이나 읽고 듣고 생각하고 쓰는 시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잘 듣기’에 대한 고민은 단순히 직업적인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가족, 연인 기타 모든 인간관계와 관련이 있다. 그러니 깊이 고민하고 skill up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외로움

『신들의 봉우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혼자만의 산은 깊다.”였다. 무엇이 깊다는 것일까. 산행의 맛? 정취? 나로서는 그 ‘외로움’이 깊다는 말로 들린다.

혼자만의 달리기는 또 어떤가. 그만큼 외로운 것이 또 없다. 최소한 도착지라도, 아니면 몇 바퀴라는 식의 목표라도 있어야 한다. 얼마나 뛰었는지 시간을 잴 시계라도 있어야 한다. 음악이라도 있어야 한다. 같이 뛰는 동료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재빠르게 지나쳐 갈 사람이라도 있어야 한다. 광복관에서 기숙사까지, 달리다보면 별별 생각이 다 든다. 그래도 멈추지 않을 수 있는 건 저만치 앞에서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 덕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자신이 어디부터 어디까지 얼마를 달렸고 어땠고 저땠고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며 하루키는 뛸 때도 글을 쓰는구나 싶었고, 그렇다면 그도 혼자 달린 것이 아니라 가상의 독자와 함께 달렸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