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화살 (2012)

“부디 당신이 재판받고 싶은 그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재판하라.”

2007년에 개봉한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다>(수오 마사유키 作)의 엔딩 크레딧에 등장한 법언(法言)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지하철 성추행범으로 기소된다. 프리터(freeter) 족으로 지내던 그는 어렵게 어렵게 구직 면접 기회를 얻게 되었고, 면접에 늦은 나머지 급히 서두르다 지하철 문에 자켓이 끼고 만다. 그리고 이 자켓을 빼려다가 치한으로 오해받는다. 관객은 이 억울하고 착하게 생긴 남자가 완전히 결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죄가 있다면, 오얏나무 밑에서 갓 끈을 고친 정도이다. 그러나 재판은 시종일관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흘러간다.

유능한 변호인들의 조력을 받으며 2년 간 모두 10번의 공판을 겪었지만, 결국 유죄를 선고받은 주인공은 재판장의 징역형 선고를 들으며 이런 독백을 남긴다:

“나는 어쩌면 가슴 깊은 곳에서는 판사를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판사만은 나 자신의 무죄를, 결백을 알아줄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이 판사의 판결이 맞는지, 틀린지는 대체 누가 판결하는가? 오로지 행위를 한 나 자신 만이 판단할 수 있다.
나는 분명히 안다. 저 판사는 틀렸다. 진실에 접근하지 못했다. 나는 하지 않았다.
나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주인공은 정말로 죄가 없을까? 혹시 주인공과 감독과 공모하여 관객을 속인 것은 아닐까?

여기서, 또 한 편의 일본영화, <라쇼몽>(1950, 구로사와 아키라 作)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도 “누가 범인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한 남자가 살해당하고, 그 남자의 아내도 강간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천만 다행으로 사건의 목격자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 목격자의 진술이 아내의 진술과 또 다르다.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진실을 알기 위해 무당을 통해 원혼까지 불러내지만, 이 원혼이 하는 얘기는 또 다르다. 이처럼 기억은 주관적이다. 명백하고 단일한 진실이 존재하는 세계란 환상에 가깝다.

‘석궁 사건’을 다룬 <부러진 화살>(2012, 정지영 作)로 가보자. 이 영화, 사법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껄끄럽고 어쩌면 억울하기도 할 정도의 작품이다. 프레임 자체가 김 교수와 박 변호사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 영화가 ‘사실에 가깝다’라고 하는 것은 주로 법정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그 정도로도 충분히 문제적이다. 반면, 법정 밖의 내용은 당연히 허구가 가미되어 있다. 영화라는 매체의 힘은 바로 이 허구마저도 사실처럼 보이게 하는데 있다. 영화적 진실과 실체적 진실을 혼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편향성이야 말로 영화의 매력이다.

‘국민배우’ 안성기가 연기한 ‘김경호 교수’는 “꼴통”이지만 이성적인 원칙주의자로 그려진다. 그는 자기 자신을 “사회가 합의한 원칙”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자라고 소개한다. 수학 교수답게 “법은 수학처럼 모순이 없기에 아름답다”라는 말까지 한다. 법정에서 직접 법조문을 찾아가며 자신을 변론하는 모습이나 구치소 내에서 꼿꼿하게 생활하며 공들여 서면을 작성하는 모습, 과거 학교의 불의에 불복하여 출제오류를 밝혀내는 모습 등을 보면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런데 그런 김 교수와 판결에 불복하여 석궁으로 판사를 위협하고, 우발적이든 고의든 석궁을 발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사람과 동일인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영화의 시선은 전적으로 김 교수와 박 변호사 그리고 다른 사법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본 법정에 머물러 있다. 애초에 이러한 의도로 제작된 영화다. 이 영화에는 김 교수의 공판이 끝나면 항상 모여 밥과 술을 나누어 먹는 이들이 등장한다. ‘사법 피해자’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사법 피해자들은 판결에 대한 억울함을 넘어 재판과정에서 가슴에 사무치는 부당함을 이기지 못해 평생을 싸우는 사람들이다. 『부러진 화살』의 원작자 서형이 쓴 『법과 싸우는 사람들』을 보면 이들이 자세히 소개된다. 사법부는 피해자를 구제하고 이로써 정의를 바로 세우는 기관인데, 사법부로부터 생겨난 피해자라니 아이러니다.

편향성은 영화에서는 미덕이겠지만, 재판에서는 죄악시 되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 박 변호사는 사법부가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김 교수를 법치주의를 위협한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엄히 처벌하기로 결의한 사실을 지적한다. 마치 이 영화가 한 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처럼, 사법부도 밥을 먹기도 전에 밥상을 한 쪽으로 기울였던 게 아니냐는 날선 비판이다. 이후 진행되는 공판 과정을 보면 이런 의심을 거두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따라가다 보면 관객 자신도 ‘잠재적 사법 피해자’라는 인식을 떨치기 힘들다.

이 영화가 ‘제2의 도가니’라는 이름을 얻으며 논란의 중심으로 올라서자 당시 재판에 관여했던 이들은 물론이고 여러 지식인들이 이 영화에 대한 평론을 내놓고 있다. 공통된 결론은 이 영화, 꽤 볼만하다는 것이다. 이정렬 판사는 “법원가족들이 이 영화를 꼭 보고 많은 생각을 하기 바란다”며 추천했다. 나 역시 법원 관계자들이 이 영화를 보고 이 영화의 기울어진 시각에 대해 억울함을 느끼길 바란다. 그리고 바로 그 감정이 적지 않은 수의 사법 피해자들이 법정에서 느낀 바로 그 감정이라는 사실도 언젠가는 알게 되길 바란다.

글쓴이

Sehee Park

Advocate for Innovators. Lawyer.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