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지코믹스』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등, 랜덤하우스코리아, 2011)

버트런드 러셀이 저명한 논리학자이자 수학자, 철학자, 반전운동가, 문필가, 바람둥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고, 더 자세히는 사회평론에서 펴낸 『러셀 자서전』(상, 하)를 읽으면 될 일이지만 권당 600쪽에 육박하는 분량이 호락하지는 않다.

희소식이다. 러셀의 일대기를 그리며 20세기 논리전쟁을 간략히 다룬 『로지코믹스』가 번역, 출간됐다.

러셀의 일대기야 워낙에 유명한 에피소드가 많다. 그가 화이트헤드나 비트겐슈타인 등과 사제관계로 엮이었던 학문적 경력이나 반전평화운동, 교육운동 등의 정치적 경력 그리고 몇 번이 결혼과 이혼을 겪은 순탄치 못한 가정사 등, 더 자세한 내용은 책을 통해서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다.

내가 이 책을 학습만화로서 평가한다면 100점을 주긴 어렵다. 러셀의 삶은 충분히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 이 점은 좋다. 그러나 수학과 논리학은 만화로 이해시키기엔 원래가 너무나 어렵다. 부족하나마 수학사나 논리학사에 대해 얼추 감이라도 잡을 수 있게 해줬으니감사하다고 해야할까. 그렇다고 이 책 자체가 저평가받을 이유는 없다. 나는 이 책의 탄탄한 구성과 독특한 전개방식을 훌륭하게 평가하고 싶다.

이 작품은 삼중 액자 구성이다. 이 책의 저자와 작자들이 모여서 회의하는 장면이 시대적으로 현재이며 가장 큰 액자이다. 좀 더 작은 액자는 러셀이 미국의 한 대학으로 강연을 하러 이동하면서, 참전 반대를 주장하는 대학생들과 맞닥뜨리게 되는 2차 대전 초기의 시간이다. 그리고 마지막 액자는 러셀의 강연 내용으로 러셀의 유년기와 강연을 할 당시까지의 내용이다.

이 세 액자는 단순히 형식적인 구분을 넘어서, 내용적으로도 중첩되며 영향을 주고 받는다. 가장 작은 액자에서 그려지는 러셀의 회고는 두번째 액자에서 참전 반대를 주장하는 대학생들과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동시에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 러셀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이 젊은 대학생들에게 자신의 답을 던진다. (강연 주제가 이다.)

가장 큰 액자에서는 이 책의 저자들이 두 개의 작은 액자를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오레스테이아」공연 연습과 연결지으며 해결의 실마리를 얻게 된다. 이 책의 저자들은 「오레스테이아」을 작품에 삽입함으로써 러셀에 대한 직접적인 판단을 대신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러셀은 참전 혹은 반전에 대한 판단을 강연 청중에게 넘기며, 각자의 답을 내놓을 것을 촉구한다. 「오레스테이아」의 결말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버지 아가멤논을 살해한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를 죽여 복수한 오레스테이아는 아테네 법정에서 재판받지만, 죄가 있고 없음의 표결이 같은 수가 된다. 이에 판결을 맡은 아테나 여신은 ‘복수의 여신’들을 달래며, 앞으로 그들이 ‘자비의 여신’들로 숭배될 것이라 말하며 갈등을 봉합한다.

이러한 구도는 자연히 독자 제위의 러셀에 대한 판단을 유도한다. 세계적인 논리학자이자 노벨문학상을 받은 문필가, 명민한 사회운동가로서 러셀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는 일생을 보다 명정하고 합리적인 것을 찾아 여행했다. 그러나 교육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가정도 화목하지 않았으며, 자식들도 정신병에 시달렸다. 그의 여행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판단은 독자의 몫이겠으나, 이 책의 결론은 (비트겐슈타인을 변용하자면) 여행의 의미는 여행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여행 그 자체에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amor mundi

지역에서 자란 인재가 지역을 지키고 가꾸어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어찌 보면 상당히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느낌을 준다.

게다가 이 시대는 자본과 노동이 국경을 넘나들며, 글로벌 유목민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있기도 하다.

공동체주의라는 이념은 자칫 배타적 민족주의, 자문화중심주의, 집단이기주의 등으로 빠질 위험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의 맥락에선 다르다. 탈촌입경의 수도권 초집중화 구조에서는 지역의 젊은 인재들이 자기 지역을 지켜내야 한다.

그래야 단기 이익을 노리는 약탈적 외부자본이 섣불리 재개발이나 골프장 개발 등의 반생태적 반민주적 토건 공사를 시작하지 못한다.

자기 지역에 튼튼하게 뿌리내린 청년이 많을수록 ‘자기 통치’에 기반한 민주주의는 비로소 꽃을 피울 것이다.

난개발도 줄어들고, 단지 낙후됐다는 이유 만으로 핵발전소 등을 떠안게 되는 비극적인 일도 없어지리라 기대한다.

내 나이 열 아홉에 너무도 생각없이 무비판적으로 서울 유학을 결정했다. 내가 살아온 지역을 가볍게 외면했다. 성찰의 기회가 없었고 감수성도 부족했다.

이제 다시 ‘나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것은 내가 뿌리내린 지역을 발견하고 가꿔나감으로써 가능하다.

‘세계 사랑’은 곧 자기 사랑의 확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