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T

오늘 또 하나의 시험을 끝냈다.

1년에 한 번 있고, 응시료만 20만원이 넘어가니,
도무지 대충 때울 수가 없어서…

7월부터 지난 주까지 매주 토, 일요일,
아침부터 밤까지 경북대 법대 열람실 자리를 지켰다.

친구 말마따나 “준비 한다고 준비가 되는 시험은 아니”라지만,
나름대로 알차게 보내본다고 기출도 풀고 책도 읽고 했다.

결과는… 언제나와 같이 잘 한 것도 아니고 못 한 것도 아니며,
안심할 정도도 아니고 불안할 정도도 아니게 됐다.
늘 이런 식이다.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모르겠다…
둔재고 천재고를 떠나서 적당히 하는 성격이 반영된 것 같다.

다행인 건, 이번 시험을 거치면서 잡스런 취미를 정리했다.
공부만 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느꼈달까…
그 공부를 할 기회가 주어질지 어떨지는 아직 모르지만…

이번 달은 훈련 막바지 및 여름휴가로 지나가고,
다음 달, 9월이면 전역까지 딱 4개월이 남게 된다.

이제야 출발선에 설 마음이 생겼다.
시험은 오늘 끝났지만, 이게 긴 여정의 시작이란 생각이 든다.

강의와 연구에 지장을 줍니다

“강의와 연구에 지장을 줍니다.” 경북대학교 법과대학 건물 앞 주차장에 학생 주차 금지를 알리며 써놓은 이유이다.

말인즉슨, 여기는 교수, 교직원 전용 주차장인데 학생들이 차를 주차하는 바람에 강의와 연구에 지장이 있다, 라는 것이다.

그냥 불편을 겪고 있다…라고 해도 이해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건물 뒷편에도 넉넉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기에 그런 이유를 대기에는 좀 구차했겠지.

강의와 연구는 대학 본연의 기능이다. 이걸 주차공간을 확보하는 데 갖다 붙이다니, 차를 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연구실로 오면 강의와 연구에 지장이 있는가? 좀 멀리 차를 주차해두고 걸어서 연구실로 오면 강의와 연구에 지장이 있는가?

만약 강의와 연구에 지장이 없고자 했다면 건물 앞 뒤로 주차장을 없애서 아예 차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한다. 그래야 연구실에서 불필요한 소음을 들을 일도 없을 것이고, 행여 머리를 식히러 산책을 갈 때도 쾌적함을 느낄 것이다.

어떻게봐도 그저 건물 앞 주차장은 편하고 좋은 자리니까 교수, 교직원 말고는 차를 대지말라는 얘기인데, 거기에 강의와 연구라는 거창한 이유를 들이대고 있으니 어쨌거나 어색하게 느껴진다.

인간 공자: 백가쟁명 (이중톈), 공자 (H. G. 크릴), 사기 (사마천, 이성규 편역), 신중국사 (J. K. 페어뱅크)

이중톈 저, 『백가쟁명』(에버리치홀딩스 간)
H. G. 크릴 저, 『공자』(지식산업사 간)
이성규 편역, 『사기』(서울대학교출판부 간)
J. K. 페어뱅크 저, 『신중국사』(까치글방 간)

이중톈은 현대 중국의 대표적인 인문고전 저술가, 강연가이다. 『백가쟁명』은 진나라 통일 이전, 즉 선진(先秦) 시대의 제자백가 중 유가, 묵가, 도가, 법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중국 사람들의 공자에 대한 사랑은 어찌나 대단한지 첫 장을 공자에 할애하고 있다.

여러 사상이 경합하였다 해도 시작은 공자의 유가이고 그 끝도 유가라 할 수 있다. 이 유가의 바탕 위에서 묵가는 인애(仁愛)를 대신하여 겸애(兼愛)를 주장했고, 도가는 유위(有爲)를 대신하여 무위(無爲)를, 법가는 예악(禮樂)을 대신하여 형벌(刑罰)을 내세웠던 것이다.

H. G. 크릴의 책은 공자가 어떻게 해서 2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도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지에 대한 책이다. 인간 공자를 학인, 교사, 철인, 개혁가 등으로 조망하고 있다. 공자 사후에 유가 후학들에 의해 덧입혀진 전설을 걷어내는 데도 신경을 쓰고 있다.

유학은 국가고시를 준비하기 위한 학문이다. 공자 사후에 현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부분이 가미되어 마치 그것이 우선인양 본말이 전도되긴 했지만,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은 전부 제후나 대신에게 중용된 뒤에 어떻게 뜻을 펼칠 것인가에 맞춰져있다.

공자는 제자들이 관직에 나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공자 본인도 기회만 된다면 관직에 나가고자 했으나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기록에 따르면 두 번은 제후가 직접 읍에 봉하려 했으나 가신의 방해로 실패했고, 두 번은 가신이 궐기하여 초빙했으나 제자 자로의 반대로 공자가 단념했다.

정작 관직에 올랐어도 성격 상 크게 활약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후대 역사가들의 분석이다. 공자는 아부를 하지 않았고, 도리어 군주를 나무랐을 것이다. 공자가 직접 수레를 타고 제자를 이끌며 제후국을 순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자 자신은 원치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그는 천상 학자였고 교육자였다. 공자의 제자별 맞춤식 교육은 익히 알려진 바다. 또한 그의 가르침을 받고 관직에 나간 제자들이 성공한 경우가 많았다. 이는 제자들 개인의 능력이기도 했겠지만, 경우에 따른 적절한 처사, 즉 예에 대해서 공자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H. G. 크릴은 공자가 사후에 성인으로 추앙되고 지금까지도 존경받는 것에 대해서 예수와 마찬가지로 그의 사도들, 제자들의 영향이 컸지만 역시 인간 공자의 매력을 떼어놓고는 제자들의 사랑과 존경, 열의를 설명할 수 없다고 적었다.

정작 공자 자신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까지 후대에 널리 알려져, 중국이라고 하는 거대 국가가 자국의 문화원을 ‘공자 학원’(마치 독일 문화원이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이름을 딴 것과 마찬가지로)이라 부를 거라고는 차마 예상도 못했을 것이다.

노쇠한 공자가 몸져 누웠을 때, 제자들이 공자를 위해 대신의 예를 올리려고 했다. 평생 관직에 나가고자 했으나 이를 이루지 못해 뜻을 펼치지 못한 스승의 마음을 헤아렸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정신을 차린 공자가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제자 중 하나가 머쓱해하며 자초지종을 알렸다.

공자는 고마워하기는 커녕 호통을 치며 제자들을 나무란다.

이렇게 대신의 예를 받는다고 해서 하늘이 모를 것 같으냐!

하늘은 알고 있다! 나를 욕보이는 것이냐!

거짓으로 대신의 예를 받는다고 내가 좋아할 것 같으냐,

제자들이자 친구인 그대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것이 더욱 좋지 않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