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퇴근

임관 2년 5개월 만에 칼퇴근이 무엇인지 몸소 깨치고 있다. 약 1년을 스케쥴 근무를 뛰었고, 나머지 1년 5개월은 출근은 누구보다 빠르게 퇴근은 기약없는 생활을 했다. 그래서, 아직은 퇴근시각에 사무실을 나서는 게 영 어색하고 불안하다. 숙소에 돌아가도 전화가 와서 당장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라고 할 것만 같고, 꼭 등 뒤에서 누가 잡아끄는 것만 같고 그렇다.

룸메이트는 이런 나에게, “아주 당연한 것을 이제야 누리는 것 뿐이다.”라고 깔끔하게 정리해줬다. 이 말에 기운이 나긴 했으나, 막상 날이 밝을 때 숙소에 돌아오니 당장에 무엇을 할지 고민이 됐다. 계획해둔 건 있었으나, 놀라움과 불안함과 설렘이 뒤섞여 이러지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침대에 누웠다. 잠깐 누웠다 일어나려고 했는데 그렇게 22시 35분까지 잤고, 그 뒤로 약 1시간 정도 운동을 했다.

18시부터 태권도 승단심사 응심자 연습이 있었다. 차라리 거기라도 갈 걸 그랬다. 인근 도서관에 가서 연체도서도 반납하고, 토요일에 있을 라이프가드 필기 검정 준비도 하고, 밀려있는 책들도 마저 읽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주 꿀맛같은 저녁 잠에 이 계획들이 실행되지 못했다. 플래너라는 건, 실행하지 않으면 있으나마나 한 것이다. 훌륭한 성공 파트너가 한갓 자기 위안 도구로 전락하는 데, 많은 사연이 필요한 건 아니다.

객관적으로 실행에 큰 무리가 있는 계획은 아니었지만, 어제의 야간훈련 및 기타 상황을 고려해서 사전에 조정하는 게 보다 현명한 대처였을 것이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이대로 잠들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때는 차라리 계획을 연기하는 기민함과 대범함을 보였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냥 내 몸이 시키는 바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따랐다. 이런 선택, 결정이 때로는 옳기도 하고 순리에 맞다는 것도 알지만, 종국에는 자괴감, 자신감 결여로 돌아올 것도 안다.

계획대로 사는 것, 계획한 대로만 이루어지는 삶, 둘 다 따분하고 매력없다. 인생의 진미는 의외성, 우연성에 있다. 그러나, 계획한 만큼도 해내지 못하는 상태에서 돌발적인 상황을 여유롭게 대처할 생각은 말아야 한다. 계획을 세우고, 조정하고, 평가하는 건 우연적 요소가 개입할 여지를 최대한 줄이고 줄인 후에, 그럼에도 찾아오는 불청객을 따스히 맞이하기 위해서다.

글쓴이

Sehee Park

Advocate for Innovators. Law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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