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마을혁명』 (강수돌, 산지니, 2010)

충남 연기군 신안1리 강수돌 이장의 고층아파트 개발 반대 투쟁기를 담은 책이다. 신안1리는 홍익대 조치원캠퍼스와 고려대 세종캠퍼스 사이에 있는 살기 좋고 한적한 농촌마을이다.

신행정수도 건설 바람과 함께 풍문으로만 돌던 고층아파트 개발계획이 차츰 현실화 된다. 이 마을에 살던 강수돌 교수(고려대 경영학부)는 신안1리 이장이 되어 고층아파트 저지투쟁 일선에 나서게 된다.

결론은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니게” 됐다. 고층아파트 건설의 삽은 떠져서 콘크리트가 올라갔으니 이겼다고 할 수 없다. 콘크리트 구조물은 올라갔으나 미분양으로 완공되지 못하고 중도에 그쳤으니 졌다고도 할 수 없다.

강수돌 교수가 고층아파트 저지투쟁에 나선 것은 이 개발계획이 절차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옳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층아파트가 들어설 땅은 원래가 1종으로 4층 이상 건물을 짓지 못하는 부지였다. 이를 전 이장이 위조서류를 근거로 민원을 제기해 15층 이상 건물을 지을 수 있는 2종으로 바꿨고, 행정당국이 기한이 지난 민원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적극 반영했다.

신안리는 대학문화촌으로 개발될 계획이었다. 양 옆에 대학을 끼고, 농업, 과수업, 임대업 등이 주업인 마을에 1,000세대가 넘는 고층아파트(15층 건물 15개동)를 짓는다는 건 난개발이다. 인근 주민의 조경권, 일조권 침해는 물론 공동체 역시 철저히 파괴될 것이다.

강수돌 교수의 입장에서 그리고 독자인 내 입장에서도 고층아파트 건설을 부당했고 또 부당해보였다. 절차적으로도 합당하지 않고, 내용적으로도 합리적이지 않다. 주민 여론이 100% 개발 찬성이 아니라 찬반이 비등비등한 상황이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닌가.

그랬다면야, 이 책이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야, 신안리 한 가운데 흉물스런 회색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 들어서서 마을 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용산참사와 같은 일도 아마 일어나지 않았거나 그렇게 끔찍한 결론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실은 달랐다. 강수돌 이장은 토건자본이 얼마나 교활하고 간악하게 움직이는지, 토건자본과 결탁한 행정권력이 얼마나 무력하고 무능한지, 언론의 펜대는 얼마나 가냘프며 휘기 쉬운지, 이에 비하면 저지투쟁에 나선 자신과 주민들은 지금껏 얼마나 순진하게 살아왔는지, 그러나 투쟁을 겪으며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철저히 처절히 깨닫는다.

결론은 이도 저도 아니게 됐다지만, 대체 어느 지역의 공동체가 “개발 마피아”에 맞서 이 정도까지 싸울 수 있겠는가. 강수돌 교수도 싸우는 과정에서 이장이 됐고 지역공동체에 깊이 개입하게 됐지만, 그나마 그와 같은 쉬이 지치지 않고 꺾일 줄 모르는 지도자가 있었기에 그만한 열매라도 거둔 게 아닌가 싶다.

이 투쟁의 기록에서 충남도의회와 연기군의회의 역할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저자는 아예 그들에게 일말의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사실 이 모든 과정이 주민의 손으로 선출된 도의원, 군의원들이 해야 할 일, 바로 정치다. 이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정치의 과소, 정치의 부족, 정치의 실종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별미는 부록으로 실린 「잘못된 개발 사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풀뿌리 운동 매뉴얼」이다. 경험이 빚어낸 지식 만큼 값진 것은 없다.

Keep moving forward

Let me tell you something you already know.

The world ain’t all sunshine and rainbows. It’s a very mean and nasty place and I don’t care how tough you are it will beat you to your knees and keep you there permanently if you let it. You, me, or nobody is gonna hit as hard as life.

But it ain’t about how hard ya hit. It’s about how hard you can get it and keep moving forward. How much you can take and keep moving forward. That’s how winning is done!

Now if you know what you’re worth then go out and get what you’re worth. But ya gotta be willing to take the hits, and not pointing fingers saying you ain’t where you wanna be because of him, or her, or anybody!

Cowards do that and that ain’t you!

You’re better than that!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 이다미디어, 2005)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를 칭하는 표현 중 이보다 나은 것은 찾기 힘들다. 그는 거의 평생을 길 위에서 보냈다. 그가 여느 부랑자, 떠돌이 노동자와 다른 점은 틈나는 대로 글을 읽고 또 글을 썼다는 점이다. 이 책은 그의 자서전이다.

에릭 호퍼는 ‘일’에서 보람을 찾는다는 건 온당치 않다고 했다. 일은 그저 일이다. 그는 퇴근 후에야 글을 읽었다. 그리고 노동은 사색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는 땀흘려 일하는 도중에 몇 가지 착상을 하기도 했다. 이른바, “머리를 아래로 하고, 엉덩이를 위로 하는 자세”의 사색이다.

어쩌면 80년대 운동권 학출들이 야학과 노조운동을 통해 꿈꿨던 ‘읽고 쓰는 주체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노동자’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릭 호퍼는 독재와 자본주의를 뒤집어 엎을 ‘혁명의 주체’는 아니다. 그는 이 자본주의 체제를 정복시킬 마음이 없다.

그가 돈에 대해 쓴 경구를 보자:

“Whoever originated the cliche that money is the root of all evil knew hardly anything about the nature of evil and very little about human beings.” (돈이 만악萬惡의 근원이라는 클리셰cliche를 만든 이들은 악의 본성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자들이다).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는데,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가? 그는 돈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고 봤다. 돈만 있으면 출신이 비천한 이라도 떵떵거릴 수 있지 않은가? 화폐는 권력과 신분, 지위를 환원시킨다. 오히려, 돈은 자유의 동력인 것이다. 돈이 인간을 해방시켰다!

정주할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평생을 자진해서 떠돌았다. 이유는 길과 길 위에서 만난 사람이 그에게 사색의 소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길 위로 나서면 일자리는 어디에나 있었고, 일자리가 있는 곳에 잠자리와 먹을거리도 있었다. 책은 퇴근하고 공공도서관에서 읽었다.

그는 몽테뉴의 수상록을 암송할 정도로 즐겨읽었다는데, 이 책과의 인연이 아주 재밌다. 여느 때와 같이 일자리를 구했는데, 일하는 도중 아주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함을 알게 됐다. 이 심심함을 달래려 근처 헌책방에 들어가 눈에 띄는 책 중 가장 두꺼운 책을 집었는데, 그게 바로 그 책이었단다.

에릭 호퍼가 살았던 20세기 아메리카는 특수한 환경임에 분명하다. 하필 그가 캘리포니아에 살았던 이유를 보라. 그 동네에는 일손을 구하는 농장이 널렸다. 기후도 노숙에 적합하다. 21세기 코리아는 어떨까? 대학 청소노동자의 생계임금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 사회이다.

밥벌이란 원래가 비루하다. 일은 생존을 위해 하는 것이지, 존엄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일에서 자존감을 얻을 수 없다면, 별개로 읽고 쓰는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독창적 사상가가 되진 못할지언정,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에릭 호퍼는 좋은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2005)

우주적 조크란 이런 것일까.

은하계를 관통하는 “초공간 이동용 우회 고속도로”의 건설을 위해 순식간에 지구 행성이 철거됐음에도 이 영화가 시종일관 유쾌할 수 있는 이유는 영화의 배경이 우주이기 때문이다, 우주!

그리고 알다시피 지구 행성을 예전 그대로 복원하는 건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H2G2로 불리는 원작소설은 SF의 고전 중에서도 손꼽히는 작품이다. 이미 많은 책이나 영화 등에서 패러디 또는 오마쥬의 대상으로 삼은 바 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보는 일은 작품 자체가 주는 즐거움을 얻는 수준을 넘어, 이 작품의 영향을 받은 다른 파생작품들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지식을 얻는 차원의 작업이라 볼 수 있다.

신은 어째서 우주를 창조하였는가. H2G2에 따르면, 어쨌거나 이 일로 인해 피조물들이 신을 원망하고 있으며, 신께서는 상당히 미안해하고 있다고….

하나 더. H2G2에 따르면, 인간은 지구에서 세번째로 뛰어난 생물이다. 두번째는 돌고래이며, 그들은 지구가 철거되기 직전에 지구를 떠난다. “안녕! 생선은 고마웠어(So long and thanks for all the fishes)”

인간은 지구가 멸망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은하계개발위원회가 관련 공문을 보냈지만, 박물관에 수십 년동안이나 쳐박아뒀기 때문이다. 이 역시 우주적 조크의 일종이지만, 작금의 상황과 연결해보면 전혀 우습지 않고 도리어 심각할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지구에서 가장 뛰어난 생물은 대체 무엇일까. 영화나 책에 답이 있다. 답을 확인하기 전에 명심할 것은 “DON’T PANIC.”

2주 만에 찾은 집

2주 만에 찾은 집. 변한 것이 없다. 그래서 안심이 되고 또 한 편으론 불안하다. 결혼한 누나는 도통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반경 5km 내에 살면서도 이렇게 보기가 힘들다. 원망은 아니다. 아쉬움이다.

금요일 밤에는 『로지코믹스』를 읽었고, 비록 만화이긴 했지만 독특한 구성과 남다른 깊이, 분량에 압도당해 새벽까지 못 잤다. 주말 의례라 할 아버지와의 운동을 걸렀다. 늦잠을 잤고 고구마로 아침을 때웠다.

점심 때는 후배를 만나서 데이트를 했다. (남자 후배다.) 삼락식당에서 장찌개와 오징어볶음을 시켜먹었다. 지난 번에도 그랬듯 오락실에 가서 철권 몇 판을 함께 하고 카페로 이동했다. 나는 그에게 간밤에 읽은 책에 대해 쉬지 않고 떠벌렸다.

예전에 구입해뒀던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를 들고 나갔다. 몇 장 못 읽었는데, 의외로 야들해서 재미가 붙었다. 그의 미용실까지 따라가서 구석에 앉아 몇 장을 더 읽었다.

토요일 밤에는 방 청소를 핑계로 동이 트기 직전까지 책장 이곳저곳을 후비며 책들을 어루만졌다. 내 앞에 무한의 시간이 주어졌다면, 선뜻 책들에 파묻혔을 것이다. 다음 주에 읽을 것들 몇 권만 골랐다.

어찌된 연유인지 연일 악몽을 꿨다. 전날엔 몇 번씩 잠에서 깨기도 했으나 오늘은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그토록 생생하다는 것에 놀랄 뿐이었다. 아침은 거르고 점심부터 먹었다.

점심을 먹고도 계속 엎드린 채 가수면 상태를 즐겼다. 살풋 잠이 들었다가도 TV소리에 눈을 뜨고, 다시 잠들고를 반복했다. 돌아누어 천정을 보다 문득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 집 거실은 참으로 적막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의 의미는 기호 속에서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지당한 말씀이다. 기호는 지도일 뿐이다. 아무리 완벽한 지도도 실재의 모사에 불과하지 실재를 대체할 수 없다. 『로지코믹스』의 저자들은 ‘광기’란 “실재와 지도를 혼동하는 것”이라 결론내렸다.

우리는 불가해한 세계에 맞서 기호로, 활자로, 책으로 도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는 내일부터 다시 달릴 것이다. 이 결심이 이번 주말 휴일의 수확이다.

『내가 살던 용산』 (김홍모·김성희·김수박·신성식·앙꼬·유승하, 2010)

용산. 내게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복잡하고 손이 떨리는 끔찍한 사건이다. 그러나 만화책이라는 핑계로 용기를 내어서 읽기 시작했다.

2009년 1월 20일 새벽, 용산에서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특공대 한 명이 사망한 참사가 있었다. 이른바 “용산 참사”이다. 철거민 유가족 측은 경찰특공대의 무자비한 진압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경찰 당국은 망루에 번진 불길이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이 만화책은 이날 죽은 철거민 다섯 명의 삶을 그렸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날 망루에 올랐는지 어떻게 해서 그날 그 높은 곳에 있게 됐는지, 그 얘기를 직접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역시 살기 위해 골리앗에 올랐던 노동자들이 떠올랐다.

대체 어느 누가, 죽기 위해 타워크레인에 골리앗에 망루에 오르겠는가? 다 살기 위해서 한 일이다. 나 혼자 살기 위해서라고, 너무나도 이기적인 짓거리라고 비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철거민들을 폭도라며, 테러리스트라며 매도하고 비난하는 것일테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지 않는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재산권, 주거권, 행복추구권 그리고 생존권을 침해받는 상황에서 그렇게 대응할 것임을 알지 않는가? 토건자본과 결탁한 행정권력의 무대응, 묵살, 가혹한 탄압에 내몰리면 누구나 그렇게 되고야 말 것을 알지 않는가?

도심 재개발이라는 건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길래, 가지지 못한 자들(Have-Nots)을 삶의 변두리로 산동네로 달동네로 내모는 결과를 낳는가? 누구를 위한 개발, 재개발인가? 이 과정에서 정치과정, 정치권력은 무슨 역할을 하는가? 이제는 비참한 감상을 넘어 현실적인 답을 내놓아야 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