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를 위한 새로운 규칙

… 당시의 나는 강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약자가 처하게 되는 도덕적 딜레마를 뛰어 넘는 시야를 갖추지 못했다. 그때 내가 못 본 건 ‘규칙을 깨라, 아니면 죽는다’라는 교훈이었다. 나는 그런 경우에 약자가 자신을 위한 새로운 규칙을 만들 권리를 갖게 된다는 점을 몰랐다.

― 조지 오웰, 「정말, 정말 좋았지」, 『나는 왜 쓰는가』 중.

삶의 실험, 실패도 성공도 없는 오로지 삶

근래 나의 최대 관심사는 2011년 한 해의 거취 문제이다. “쿨한듯 쉬크하게” 초연한 척 하고픈데 그게 잘 안 된다. 어디까지나 수양이 부족한 탓이다.

활자가 눈에 잘 안 박혀 필사를 하고 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손을 단련하는 데 필사만큼 효과적인 건 아직 찾지 못했다. 운동도 다시 신경써서 하려고 한다.

나는 누구보다도 밥벌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가급적 사교육 시장의 일원이 되는 건 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교육은 정말 필요한 학생만 이용하고, 공교육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다만, 그렇게 벌어먹고 사는 사람을 나쁘게 말하고 싶진 않다. 나도 한 때는 그들 중 하나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없으니까. 궁하면 뭐라도 해야하는 법이다. 그런 이들을 욕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대학원에 진학하든 유학을 가든 아카데미를 다니든 계속해서 뭔가 ― 아마도, 정치학 ― 를(을) 배울 생각은 있다. 그러나 전업 학자가 되어 식솔을 꾸릴 생각은 않는다. 그러려면 반드시 교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되고자 노력하는 건 이제 그만 좀 하고 싶다.

누군가는 “차라리 기술을 배우라”고 했다. 그것 뿐이 아니다. 내 삶에 대한 기대를 확연히 낮추어야 한다. 먹을 것 덜 먹고 입을 것 덜 입어야 한다. 처음에는 안 하는 것이다가 나중에는 못 하는 것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야 한다.

굳이 고르라면 풍요보다는 존엄을 택하겠다는 입장이다. 이 말이 곧 풍요는 존엄과 배치된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자본가나 대지주가 아니며 더는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픈 내 존재의 실존적 결단이다.

현재로선 시한부적 결단이지만, 이 삶이 그럭저럭 괜찮으면 평생 이렇게 살아보려 한다. 한마디로 “삶의 실험”(Life Experiment)이다. 실험이니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다. 삶이니 실패도 성공도 없다. 오로지 삶이다.

누나의 결혼

지난 일요일. 갑작스런 추위가 잠시 숨을 고르던 그 날. 누나가 결혼했다.

누나가 결혼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우스웠고, 갑자기 속상했다가, 점점 걱정이 됐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누나의 결혼’이라니. 연지곤지 찍고 소달구지 타고 읍내로 영영 가버리는 그림이 떠오르지만 사실은 바로 옆 동네로 이사했을 뿐이다. 게다가 누나와 나는 고등학교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외하며 살았다. 그래서 아직은 누나의 결혼이 크게 와닿지 않는다.

어릴 적에는 다투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고작 한 살 차이라 우리 둘은 키도 고만하고 지식도 고만하고 생김도 고만한데, 부모는 항상 “누나 먼저”를 강조했고, “누나한테 잘 좀 하라”고 나를 다그쳤다. 어린 나는 그게 그렇게도 억울했다.

내가 보기엔 칭찬을 받아도 내가 더 받을 게 많고, 귀여움을 받아도 애교가 많은 내가 더 받아야 마땅한데, 왜, 어째서, 부모는 누나를 먼저 챙기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아마도 누나를 ‘부모님의 애정’이라는 제한된 자원을 두고 제로섬 게임을 벌이는 경쟁상대 쯤으로 여겼나보다. 맞서 싸워야 할.

거기다 주변에 온통 여자 형제에 여자 꼬마아이들 뿐이어서, 나는 어떻게든 그 무리에 끼고자 누나를 걸고 넘어졌고, 때로는 누르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 같다. 말하자면, 누나는 ‘기성 체제의 일부’였고, 나는 ‘현상 타파’를 원했던 셈이다. 이외에도 내가 ‘애정결핍’이었음을 입증하는 사실의 파편은 곳곳에 있다. 나는 그런 아이였다.

또한, 그런 남동생의 존재 때문에 누나가 감당해야 했던 불편과 고달픔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할 만큼 무심한 아이였다. 나중에야 알게 됐다. 누나가 누나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들에 대해서는. 누나는 내가 태어나는 바람에 모유를 충분히 먹지 못했다. 독차지 하던 부모의 애정도 나누어야 했다. 하필이면 동생이 무엇 달린 ‘사내’인지라 그 비애는 더 컸으리라.

부모로부터 전해들은 말이긴 하지만, 누나는 미련하게도 그런 남동생을 어려서부터 아끼고 사랑했단다. 내가 누워만 지내던 갓난아기 시절에는 가만히 기어와서 지켜보고, 보행기를 타고 다니던 시절에는 보행기를 밀어주기도 하고, 그러니까 몇 년 후에 시작될 ‘남매전쟁’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채, 마냥 좋아서는.

사춘기를 거쳐 관심사도 활동 반경도 만나는 사람들도 달라지면서 누나와 나는 서로 다른 세계의 일원이 됐고, 그 때문에 충돌하는 일은 거의 없이 지금까지 지냈다. 열전은 흐지부지 종결됐고 긴 평화가 이어졌다. 간간이 정상회담을 하긴 했으나 관계의 진전 같은 건 없었고 어느덧 ‘서로 예의를 차리는 사이’가 됐다. 서로 싸울 일도, 싸울 정도의 애정도 없다. 나이가 먹으며 자연히 이렇게 됐다.

이제는 고향에 내려가도 아주 당연히 누나를 보는 건 불가능하리라. 그러니까 집에 도착해서 짐 따위는 던져놓고 아이스크림이나 떠먹으며 티브이를 보고 있노라면, 밤 늦게 “동생 왔어?”하며 현관에 들어설 누나를 기대하기란 어려울 거란 얘기다. 책과 잡지, 옷가지, 신발, 작업물 등이 뒤섞여 온통 어지럽던 누나의 방도, 없다.

누나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