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시한부 인생

남은 시간이 얼마되지 않음을 실감한다. 인간은 누구나 시한부 인생이다.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만 있다.

어느 작가의 말마따나, 사랑할 시간도 부족하다. 사랑만 하기에도 부족한 삶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보다는 “사랑한다” 말하길 추천한다.

여전히 덜 여문지라, 인연이 끊어지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슬프고 아프다. 둘 중 어느 쪽이라도 그 슬픔과 아픔을 견딜 수 있을까 싶다.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다. 다만, 사랑한다 말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말해야 한다.

배움과 깨달음

배움과 깨달음. 이 둘이 언제나 함께일 수는 없지만, 둘 모두 너무나 값지다. 조용헌은 산을 오르며 느끼는 청량감을 mountain orgasm이라 했다. runners’ high란 말도 있으니, learners’ high란 표현도 가능하지 않을까.

깨달음은 깨는 것에서 온다. 무엇을 깨는가? 자기를 둘러싼 견고한 알껍질을 깬다. 이 자기 세계를 균열하지 않는 앎, 배움이란 소용이 없다. 깨지면 아프다. 쓰라리다. 그래서 아프지 않은 배움은 배움이 아니다.

그러나 알을 깨봤자, 다시 더 두껍고 견고한 껍질을 만날 뿐이다. 영영 벗어날 수 없는 이 껍질을 깨고 다시 싸이고 깨고. 그게 배움과 깨달음의 전부이다. 이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 희열을 얻는다는 건 인간이 가진 대단한 아이러니다.

희열은 배움과 깨달음이 주는 변화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다. 결국 또 아프게 껍질을 깨야하지만, 오직 변화한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배움의 전후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그걸 배움이라 부르지 않는다.

확신

너는 꼭 무엇이 될 필요가 없다.
특히나 번듯한 무엇, 남부럽지 않은 무엇이 될 필요는 더욱 없다.

너는 지금의 너 그대로 충분하다.
그대로 충분히 아름답고 멋지다.
실패마저도 영롱히 빛난다.

그러니 너의 삶에 좀 더 확신을 갖길 바란다.

어머니 생신 2

어머니 생신 (2008. 7. 19.)

어머니 생신이었다. 나를 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신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 건 얼마되지 않았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고, 그저 나이가 먹어가며, 그런 마음이 깊게 생겼다.

자식은 죽을 때까지 부모를 보고 배운다. 나는 저렇게 되지 않아야지 하면서 어느새 그 모습을 닮아간다. 지독한 반복이다. 마치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Cien años de soledad) 같다. 우리는 정말 더 나아지고 있을까?

보잘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는 부모의 삶을 예찬하고 싶다. 내게 생명을 주신 것만으로도, 거기에 더해 좋은 본이 되어주신 것에도.

타인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두 분의 삶을 기록해두고 싶다.

모든 희망은 헛되고, 헛되기에 희망이다

오예, 주말이다.
이 비를 뚫고
대구로 간다.

아아, 나는 간다.
무더위와 가족이 기다리는
대구로 간다.

친구들이 나더러 점점 더 염세적인 인간이 되어간다고 한다. 원래가 낙천가는 아닌데다, 시간이 갈수록 헛된 희망을 하나 둘 버려가는 게 눈에 보이나보다.

무릇 모든 희망은 헛된 법이다. 헛되기에 희망이다. 희망의 사명은 처음 그것을 품을 때 느끼는 약간의 설렘과 희망이 꺾이었을 때 오는 영원한 좌절감에 있다. 그럼에도 다시 희망한다. 이것이 삶이다.

나는 여전히 많은 것을 희망한다. 여전히 사람을 깊이 믿지만 더는 쉽사리 기대하지 않을 뿐이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바는 넘치지만 굳이 강요치 않을 뿐이다.

세계의 좋은 상태란 없다. 세계는 언제나 그 자체로서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완전하게 존재한다. 세계가 뭇개인의 희망과 의지에 일일이 응답할 의무는 없다. 환상 속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건, 개인의 자유다. 그게 키치든 무엇이든 마찬가지다.

아직 나는 나에게도 남에게도 자신있게 떠벌일 희망을 품지 못했다. 찾질 못했다. 그 뿐이다.

하마터면 농구화를 덜컥 살 뻔했다

하마터면 농구화를 덜컥 살 뻔했다. 서점 가는 길에 나이키 매장이 있더라. 섹시하게 써진 S.A.L.E., 네 글자에 홀려 문을 밀고 들어갔다.

요즘 동기들과 하는 농구에 맛이 들려 농구화를 하나 장만할까 하던 참이었다. 운동화 신고 뛰다가 발목이 몇 번 삐끗했다. 순간적인 횡 움직임이 많아서 그런 듯.

아무튼 그랬는데, 이쁘게 잘 빠진 놈이 하나 있었다. 260을 보여달라했는데 없단다. 255는 발톱이 아플 것 같고, 265는 발이 좀 놀고, 딱 맞는 사이즈는 아닌 것 같은데, 점원의 입에서 나온 “좀 작게 나온 거에요”랄지, “원래 크게 신는 거에요”라든가, “양말 두꺼운 거 신으실 거 아니세요” 등등, 말도 안 되는 꼬임에 넘어갈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서 그냥 안 사고 나왔다.

참고로, 신발은 발이 붓는 저녁에 양발 중 큰 발에 맞추어 사는 게 좋단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

마치 나를 타박하듯 비가 퍼붓더라. 우산 덕에 덜 아팠지만, 후두두둑, 그 소리는 혹시라도 내가 잊고 있을, 내 죄를 잊지말라, 라는 경고 같았어.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 특히 그 누군가가 오랜 친구라면, 그 시간은 참 값진 것 같아. 책과 함께라서 그다지 지루하지도 않았어. 미뤄온 얇은 책 한 권을 끝냈지. 젖은 바지와 운동화를 말리며.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이라고들 하지. 아마도, 절은 조직, 다수겠고, 중은 개인, 소수겠지. 그런데, 그렇게 중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나서 어디 그 절이 잘 될 수 있을까나? 바꿔말해, 개인을 치유하고 키워줄 수 없는 조직이 잘 굴러갈까?

개인이 조직에 무조건적으로 헌신하길 바라는 건 무리라고 봐. 게다가 조직 속에서 내면의 치유와 능력의 신장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개인이있다면, 그건 대체 어떻게 봐야할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 아님 정말로 조직을 사랑하는 걸까.

좋은 일을 하면서도 돈을 벌 순 없을까, 하고 고민하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돈을 벌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도 힘든 세상이야, 지금은. 근데, 대체 좋은 일이란 뭘까.

사기업에 고용되어 노동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야? 그건 그저 사리사욕을 위한 거야?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기업주를 위한 거야? 기업에서 생산하는 재화는 소비자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지 않나? 그건 좋은 일이 아니야? 외화벌이는 좋은 일이 아니야?

답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도 중요한 만큼, ‘어떻게 할 것인가’도 중요해. 어떤 조직, 어떤 자리라도 아주 약간이나마 재량(discretion)이라는 게 주어지니까. 그 재량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그걸 고민해봐야겠지. 지금 당장 자신이 가진 것을 헤아릴 줄 아는 능력, 그게 바로 현명함이야.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간절히 원해야 할까 아니면 무심한 듯 쉬크해야 할까. 절의 망조를 남들보다 앞서서 읽고 봇짐을 싸는 중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쫓겨나는 걸까, 화를 피하는 걸까. 선산을 지키는 건 정말로 굽은 나무일까.

우연한 만남과 무수한 헤어짐

(참모장님의) 귀국 일정에 맞춰 공항에 갔드랬다. (가는 길에 인천대교에서 추락한 고속버스도 봤다) 인천공항→인천공항공사→민영화→진아누나로 이어지는 연상을 거쳐 전화를 했다. 누나는 주말이라 서울에 있다고. “지혜도 대한항공에서 일해!”

근 5년만에 지혜누나를 만났다. 보배도 그렇고 진아누나도 그렇고 다들 ‘여행’에 관련된 일을 하는구나. 동영이가 호텔리어가 된다면 여행사를 차려도 좋겠군, 싶더라. 성수기라 바빠서 짧게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더 놀라운 건 다음이다. 입국 수속을 돕는 의전실에 연락했는데, 이 전화를 받은 병사가 2007년도에 나와 함께 인도에 다녀온 재민이었다. 재민이 왈, “저번에 출국하실 때도 제가 나갔는데요. 전 형 알아봤는데….” 원래 성남에서 복무하는데, 잠시 파견됐단다.

우연한 만남과 무수한 헤어짐이 공항에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