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용기를 비웃지 말라

한 명문대생의 자발적 퇴교로 여기저기 시끄럽다. 내가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곳은 트위터로, 이 사건으로 또 한 번 트위터의 위력을 실감했다. 이 소식은 블로그 및 인터넷 매체를 통해 먼저 전파됐고, 차츰 오프라인 매체에도 기사가 실리기 시작하면서 확산됐다. 그리하여, 자연히 논의가 변질되기도 했다.

일단, 수준 이하의 인신 공격에 대하여는 가볍게 무시하자. 그런 것들은 상종할 가치도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진정성과 현실성에 대한 논란일 것이다. 진정성 문제는 한마디로 “저거 다 쇼하는 거 아니냐?”로 바꿔서 말할 수 있겠고, 현실성 문제는 “저런다고 뭐가 달라져?” 정도의 물음이 되시겠다.

노는 꼴들이 하도 우스워서 글을 쓰긴 한다만, 위의 두 문제제기 역시 나로서는 가뿐히 무시해버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진정성과 현실성, 이 두 가지는 예전에 강의석씨가 종교의 자유를 위해 투쟁할 때도 제기됐고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변호사가 양심선언을 했을 때도 여지없이 튀어나왔다.

당시에도 이래저래 말들은 무성했지만, 정작 그 말들을 뱉은 사람이 자신의 진정성과 현실성을 먼저 보여 준 경우는 결코 없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냥 씹고 싶어서 저 두 가지 얘기를 꺼내기도 한다는 말이다. 거기다 대고 대체 무슨 말을 해주랴, 그냥 나불거리도록 두는 수밖에….

우선, 진정성 문제는 이미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 때, 김상봉 교수가 참여한 전국철학앙가주망네트워크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그들은 진정성을 판별하는 조건으로 ① 유의미성, ② 이익 초연성, ③ 자기나약성에 대한 자기저항, ④ 항상적 자기시험 용의, 를 내걸었다. 나는 이 조건을 조목조목 따져 볼 생각이다. 만약 당신이 이 조건에 동의할 수 없다면, 글 읽기는 여기서 그만둬도 좋다.

그 학생(이미 실명이 널리 알려졌으나, 내가 껄끄럽기에, ‘그 학생’으로 쓴다)의 선언으로 ‘공공연한 비밀’이 세상에 공개됐다. 누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기에 사실이 아니었던 것들이 이로써 사실이 됐다. 그 학생의 선언을 통해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자본과 결탁하고 있는 대학의 모습과 그 대학 속에서 신음하는 있는 대학생의 ‘불편한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 선언의 ‘유의미성’은 이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익 초연성’ 조건도 만족한다. 그 학생은 현직 대통령의 모교 경영학과를 다니고 있었다. 요즘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혹시 취직에 도움이 될까 싶어 경영학과로 전과하거나 경영학 이중전공을 택한다. 물론, 경영학에 무지한 채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것 자체도 문제가 있겠지만, 절대 다수는 오로지 취업을 위해 경영학을 배운다. 이 자발적 퇴교 선언은 그 학생의 얻게 될 이익에 해가 되지 결코 득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 학생은 지금껏 자신이 ‘승자’로 살아온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고 반성했다. 자본과 대학 탓만을 하지 않고, 그 속에서 그들과 부끄러운 결탁을 하며 현상 유지를 해왔던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한다. 작은 돌멩이 하나 빠져도 이 거대한 탑은 끄덕없으리란 현실 인식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때를 잃어버리면 평생 자신을 찾지 못하고 살아갈 것 같아, 자신은 탈주하고 저항하련다고 분명히 밝힌다. 이로써, 세번째 조건인 ‘자기나약성에 대한 자기저항’도 인정할 수 있다.

그 학생은 지금껏 실명으로 반전운동 및 촛불집회 등의 활동에 참가했다. 또한, 이번 대자보 게시도 실명이었다. 앞으로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는 자기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자타의 시험을 받으려는 용의가 충분했다고 볼 수 있다. 그 학생의 행보에 따라, 이 ‘자기시험 용의’가 항상적인지 일시적인지는 판가름이 날 문제이다. 진정성 논란은 이 정도면 족할 것이다.

다음이자 마지막으로, 현실성에 대한 논란이다. 그 학생도 자기와 같은 작은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고 그 거대한 탑이 무너지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역시 정확히 예측했듯 작은 균열 정도는 낼 수 있었다. 이 자발적 퇴교 선언의 파급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이 선언을 두고 자신의 처지나 입장을 고민해보지 않을 대학생은 없으리라. 겉으로는 “치, 좋은 대학 다니는 주제에.”라며 삐죽거릴 수도 있겠지만, 선언의 내용에 대해서는 십분 공감할 것이다.

이렇게 공감대가 널리 형성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도 저항도 없는 경직된 대학 사회. 그리고 이런 대학 사회를 그대로 용인하고 묵인하는 한국 사회. 그 학생의 선언은 이 구정물에 작은 돌멩이를 던진 셈이다. 워낙에 구린 물이라 돌멩이는 금새 자취를 감추었지만, 한 번 일렁인 물결은 퍼지고 퍼져 구석구석 닿았다.

대체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이미 많은 것이 달라졌다. 또 달라지고 있다. 완벽주의자들은 평생에 모를 것이고, 아마도 깨닫지 못할 것을 그 학생은 이미 깨달았다. 완벽주의자들이 완벽한 대안을 찾는다는 핑계로 빈둥거리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 학생은 단기필마로 세상에 뛰어들어 자신의 화두를 던지고야 말았다.

관전하는 입장에서 “저런다고 뭐가 달라져?”를 내뱉기는 쉽다. 그리고 편하다. 몸도 편하고, 속도 편하다. 냉정한 현실 분석의 탈을 쓰고 비겁한 자기 변명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누구는 학교가 좋고, 사회가 올바르게 돌아가기에 자퇴 안 하고 있는 줄 아는가?”하고 물을 수도 있다. 정당한 물음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현실이 썩어빠짐을 시인했기에 정직하다고도 하겠다.

다만, 그쯤에서 그치면 딱 좋다. 타인의 용기를 비난하는 것이 자신의 비겁을 정당하게 만드는 건 아니다. ‘지금의 나는 비겁하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작은 용기라도 보여야 한다. 그게 안 되면, 몸을 움직이라고 하지는 않을 터이니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지지한다.” 정도라면 써주면 고맙겠다. 그 학생의 선언 앞에서 괜히 찔려하는 당신을, 나는 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Sehee Park

Advocate for Innovators. Law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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