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나기 전에는 어떤 사람도 되지 못한다

“스무 살 때라. 떠올리자니 전생 같네요.” 턱을 괴고 20대 시절을 떠올리던 그는 젊은 시기의 불안에 대해 조언한다.

“그 무렵엔 그런 게 있죠. 당장이라도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빨리 어떤 사람이 돼야 할 것 같은 불안감. 하지만 청춘은 원래 불안하고 초조한 거죠. 그게 지극히 당연한 거고 세월이 지나기 전에는 어떤 사람도 되지 못한다는 걸 받아들여야 해요.”

그리고선 그렇게 불안에 몸이 달지 않아도 사람들은 자기가 되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사람이 될 가능성이 굉장히 많다고 덧붙인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스스로가 결정하는 게 중요하겠죠.”

― 김연수, http://chunchu.yonsei.ac.kr/news/articleView.html?idxno=14868

새내기를 생각한다

새내기를 생각한다

[백양로]고려대 김예슬씨의 대학 거부 선언을 보며

문자 그대로 ‘생지옥’을 뚫고 백양로에 발을 들인 새 동무들을 환영한다. 설렘과 떨림으로 캠퍼스와 신촌 곳곳을 누빌 동무들을 생각하니 나까지도 신이 난다. 우리, 학번과 나이를 물어 위-아래를 따져대는 까탈은 그만두자. 대학이라는 공간에서는 모두가 다 같은 ‘배움의 벗(학우)’이다. 동무이다. 이것이 “아, 됐고! 일단 대학에만 가”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던, 바로 그 ‘대학문화’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영원한 맞수’ 운운하며 내내 으르렁댈 안암골 모 대학의 학생이 얼마 전 자발적 퇴교 선언, 대학 거부 선언을 해 화제가 됐다. ‘선언’이라지만, 달랑 석장의 자필 대자보였다. 촌스럽지만 그 파급은 엄청났다. 3월, 백양로의 공기가 어떤지는 나도 모르는 바 아니다. 교정을 뒤덮은 꽃들이 여러분의 마음마저 점령했으리라. 허나, 그 들뜸과 설렘의 와중에도 이 선언이 던진 물음만큼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믿을 수 없겠지만, 그 물음 안에 여러분의 미래가 있다.

김예슬씨의 선언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학, 대학생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화두이다. ‘대학 입학’을 목표로 모든 걸 유예한 채 입시전쟁에 참전했건만, ‘취업’이란 관문 앞에 또다시 꿈을 유보해야만 하는 현실. 이 현실에서 우리는 언제나 꿈꾸기를 꿈꾸지 끝내 꿈을 살지는 못한다. 강의도, 강의 밖 생활도 오로지 취업에만 영점 조준 되어있다. 그 외의 곁눈질은 ‘잉여’들이나 하는 짓이다. ‘대학 졸업’이 단지 이력서의 학력을 한 줄 더 늘려주는 정도라면, 대학생(大學生)으로서 대학(大學)을 다닌다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까.

나는 김예슬씨와는 달리, 알량한 졸업장 하나를 건지려고 4년 6개월의 시간을 악착같이 버텼다. 굳이 유난을 떨며 이중전공도 이수했고, 연애도 나름 끈덕지게 했으며, 학회나 학생회, 학외단체 활동도 부지런히 했다. 나는 대학 내내 열심히만 살면, 졸업 후에 버젓한 ‘무언가’가 돼 있을 줄 알았다. 막상 대학을 졸업하고 보니, 나는 어쩐지 유명대학을 나오지 못한, 비상경계열 출신의 ‘루저’가 돼있었다. ‘위너’가 되고픈 욕심은 없었지만 적잖이 씁쓸했다. 천만다행으로 학자금 대출을 받지 않아 빚쟁이 신세는 면했다.

진심으로 여러분의 앞날이 장밋빛이길 바라지만, 분명 순탄치 않을 것이다. 이건 으름장도 엄살도 아닌, 그냥 현실이다. 구태여 청년실업률과 같은 경제지표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도리어 현실은 숫자보다 잔인하다. 이 현실 속에서 누구나 “나는 아니겠지”하며 ‘예외’가 되고픈 맹랑한 희망을 품지만, 언제나 ‘예외’야말로 ‘예외’적이다.

그러니 다들 ‘안정’만을 좇아 10차선 탄탄대로로 뛰어드는 게다. 분명 10차선 대로였는데 너나없이 달려드니 숨 막힐 듯 치열하다. 그 길 끝에 무슨 반전이 기다릴지는 생각도 않고, 그저 뒤쳐질까만 걱정하고 달린다. 이제는 그 길마저도 “금융공황”과 “경기악화”를 겪으며 위태롭다 한다. “혼돈이 곧 일상”인 시대, 이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명문대’ ‘유망학과’ 재학생의 자발적 퇴교 선언은 “이렇게는, 더는 못 살겠다”고 하는 이 시대 청춘의 비명으로 들린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 뒤를 따라 자발적 퇴교 ‘드립’을 감행하는 베르테르가 될 필요는 없다. 학내에도 할 일은 있고, 대안을 모색할 기회도 있다. 지금은 그저 이 사건을 이 시대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화두를 던질 기회로 삼으면 족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역시 답 없는 물음이지만 지칠 때까지 한 번 되물어보라. 이제 ‘대학생’은 되었으니 지금이야말로 “무엇이 될 것인가”가 아닌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을 때이다. 그 물음 안에서, 부디 원 없이 실패하고 기약 없이 방황할 수 있길 바란다. 인간은 늘 노력하는 한 방황하고, 방황 속에서만 길을 발견한다. 궁금하지 않은가, 10차선 도로가 아닌 오솔길에는 또 어떤 삶이 도사리고 있을지가 말이다.  (연세춘추, 2010.3.22.자, 원문 바로가기: http://chunchu.yonsei.ac.kr/news/articleView.html?idxno=14860)

어느 수업의 자기소개

아마 이연호 교수님 수업이었을 것이다. 강의 첫 시간에 A7 정도 크기의 메모지를 나눠주시면서 자기소개를 써서 내라고 하셨다. 장래희망도 같이 쓰라고 하셨던 것 같다. 아무튼 그걸 사진까지 붙여서 내라고 하셨다. 그때 내가 무슨 내용을 썼나 궁금하다. 아직 교수님께서 그 메모지를 갖고 계신다면 찾아가서 한 번 보여달라고 하고 싶다. 그래서 확인하고 싶다. 그 당시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했는지…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거기에 쓴 대로 살고 싶다. 지금부터라도.

타인의 용기를 비웃지 말라

한 명문대생의 자발적 퇴교로 여기저기 시끄럽다. 내가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곳은 트위터로, 이 사건으로 또 한 번 트위터의 위력을 실감했다. 이 소식은 블로그 및 인터넷 매체를 통해 먼저 전파됐고, 차츰 오프라인 매체에도 기사가 실리기 시작하면서 확산됐다. 그리하여, 자연히 논의가 변질되기도 했다.

일단, 수준 이하의 인신 공격에 대하여는 가볍게 무시하자. 그런 것들은 상종할 가치도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진정성과 현실성에 대한 논란일 것이다. 진정성 문제는 한마디로 “저거 다 쇼하는 거 아니냐?”로 바꿔서 말할 수 있겠고, 현실성 문제는 “저런다고 뭐가 달라져?” 정도의 물음이 되시겠다.

노는 꼴들이 하도 우스워서 글을 쓰긴 한다만, 위의 두 문제제기 역시 나로서는 가뿐히 무시해버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진정성과 현실성, 이 두 가지는 예전에 강의석씨가 종교의 자유를 위해 투쟁할 때도 제기됐고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변호사가 양심선언을 했을 때도 여지없이 튀어나왔다.

당시에도 이래저래 말들은 무성했지만, 정작 그 말들을 뱉은 사람이 자신의 진정성과 현실성을 먼저 보여 준 경우는 결코 없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냥 씹고 싶어서 저 두 가지 얘기를 꺼내기도 한다는 말이다. 거기다 대고 대체 무슨 말을 해주랴, 그냥 나불거리도록 두는 수밖에….

우선, 진정성 문제는 이미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 때, 김상봉 교수가 참여한 전국철학앙가주망네트워크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그들은 진정성을 판별하는 조건으로 ① 유의미성, ② 이익 초연성, ③ 자기나약성에 대한 자기저항, ④ 항상적 자기시험 용의, 를 내걸었다. 나는 이 조건을 조목조목 따져 볼 생각이다. 만약 당신이 이 조건에 동의할 수 없다면, 글 읽기는 여기서 그만둬도 좋다.

그 학생(이미 실명이 널리 알려졌으나, 내가 껄끄럽기에, ‘그 학생’으로 쓴다)의 선언으로 ‘공공연한 비밀’이 세상에 공개됐다. 누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기에 사실이 아니었던 것들이 이로써 사실이 됐다. 그 학생의 선언을 통해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자본과 결탁하고 있는 대학의 모습과 그 대학 속에서 신음하는 있는 대학생의 ‘불편한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 선언의 ‘유의미성’은 이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익 초연성’ 조건도 만족한다. 그 학생은 현직 대통령의 모교 경영학과를 다니고 있었다. 요즘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혹시 취직에 도움이 될까 싶어 경영학과로 전과하거나 경영학 이중전공을 택한다. 물론, 경영학에 무지한 채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것 자체도 문제가 있겠지만, 절대 다수는 오로지 취업을 위해 경영학을 배운다. 이 자발적 퇴교 선언은 그 학생의 얻게 될 이익에 해가 되지 결코 득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 학생은 지금껏 자신이 ‘승자’로 살아온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고 반성했다. 자본과 대학 탓만을 하지 않고, 그 속에서 그들과 부끄러운 결탁을 하며 현상 유지를 해왔던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한다. 작은 돌멩이 하나 빠져도 이 거대한 탑은 끄덕없으리란 현실 인식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때를 잃어버리면 평생 자신을 찾지 못하고 살아갈 것 같아, 자신은 탈주하고 저항하련다고 분명히 밝힌다. 이로써, 세번째 조건인 ‘자기나약성에 대한 자기저항’도 인정할 수 있다.

그 학생은 지금껏 실명으로 반전운동 및 촛불집회 등의 활동에 참가했다. 또한, 이번 대자보 게시도 실명이었다. 앞으로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는 자기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자타의 시험을 받으려는 용의가 충분했다고 볼 수 있다. 그 학생의 행보에 따라, 이 ‘자기시험 용의’가 항상적인지 일시적인지는 판가름이 날 문제이다. 진정성 논란은 이 정도면 족할 것이다.

다음이자 마지막으로, 현실성에 대한 논란이다. 그 학생도 자기와 같은 작은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고 그 거대한 탑이 무너지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역시 정확히 예측했듯 작은 균열 정도는 낼 수 있었다. 이 자발적 퇴교 선언의 파급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이 선언을 두고 자신의 처지나 입장을 고민해보지 않을 대학생은 없으리라. 겉으로는 “치, 좋은 대학 다니는 주제에.”라며 삐죽거릴 수도 있겠지만, 선언의 내용에 대해서는 십분 공감할 것이다.

이렇게 공감대가 널리 형성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도 저항도 없는 경직된 대학 사회. 그리고 이런 대학 사회를 그대로 용인하고 묵인하는 한국 사회. 그 학생의 선언은 이 구정물에 작은 돌멩이를 던진 셈이다. 워낙에 구린 물이라 돌멩이는 금새 자취를 감추었지만, 한 번 일렁인 물결은 퍼지고 퍼져 구석구석 닿았다.

대체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이미 많은 것이 달라졌다. 또 달라지고 있다. 완벽주의자들은 평생에 모를 것이고, 아마도 깨닫지 못할 것을 그 학생은 이미 깨달았다. 완벽주의자들이 완벽한 대안을 찾는다는 핑계로 빈둥거리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 학생은 단기필마로 세상에 뛰어들어 자신의 화두를 던지고야 말았다.

관전하는 입장에서 “저런다고 뭐가 달라져?”를 내뱉기는 쉽다. 그리고 편하다. 몸도 편하고, 속도 편하다. 냉정한 현실 분석의 탈을 쓰고 비겁한 자기 변명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누구는 학교가 좋고, 사회가 올바르게 돌아가기에 자퇴 안 하고 있는 줄 아는가?”하고 물을 수도 있다. 정당한 물음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현실이 썩어빠짐을 시인했기에 정직하다고도 하겠다.

다만, 그쯤에서 그치면 딱 좋다. 타인의 용기를 비난하는 것이 자신의 비겁을 정당하게 만드는 건 아니다. ‘지금의 나는 비겁하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작은 용기라도 보여야 한다. 그게 안 되면, 몸을 움직이라고 하지는 않을 터이니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지지한다.” 정도라면 써주면 고맙겠다. 그 학생의 선언 앞에서 괜히 찔려하는 당신을, 나는 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