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고미숙, 2008)

시절인연: 인연은 우주가 정하는 것

저자의 책을 읽고 강연을 들으면서 “인연은 우주가 정하는 것”이라는 평범하지만 쉬이 납득할 수 없는 명제를 하나 얻었다. 헤어짐에 있어 “시절인연(時節因緣)”의 영향을 쏙 빼놓고 “주체”에만 모든 책임을 지울 순 없는 일이다. 니 탓, 내 탓 따질 필요없이 그저 우주 탓이라는 얘기이다. “내 삶에서 알아서 비켜나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란 말이다. 자, 이제 이 앎을 내 삶과 같게 하려면? 오는 인연 안 막고, 가는 인연 안 잡고…. 그러나 이건 예의 그 “쿨!”함이랑은 다른 얘기다.

진정한 에로스의 힘은 나를 혁명적으로 뒤바꾸는 것

우리의 “에로”는 늘 몸의 쾌락에만 집중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에로스의 힘은 ‘나’를 혁명적으로 뒤바꾸는 것이다. 내 안의 또 다른 힘을 폭발적으로 이끌어내는 힘이 바로 에로스다. “에로스의 격발은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로 가능”(141쪽)하다. 그 밥에 그 나물인 부류 속에서 그런 충돌이 가능하긴 어렵다. “우리 시대의 연애가 썰렁한 건 무엇보다 ‘차이’가 부재하기 때문”(194쪽)이란다. 차이가 없기에 서사도 없고, 서사가 없으니 재미가 없고, 다른 재미를 찾다보니 쾌락에만 빠지게 되고…. “권태 아니면 변태!”(88쪽) 강연 때는 이런 말도 했다. “교사 같은 안정된 정규직 직장을 가진 여성은 백수 건달 남자를 만나는 편이 더 재밌지 않겠느냐?”

사랑은 고이는 것stock이 아니라 흐르는 것flow이다

사랑은 말하자면 “흐르는 것flow”인데, 소유는 “고이는 것stock”이다. “사랑이 화폐화”(199쪽)하면 소유가 되고, 소유는 집착을 낳는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이 쉽사리 집착으로 변질되어, 이별을 반가이 여기지 못하고 “너, 부셔버릴거야” 빠드득 이를 갈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연애를 소비와 분간하지 못하는 족속들이 등장하는 건, 꼭 인간이 천박해서가 아니라 현대 사회에 물신숭배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가능하면 데이트를 할 때도 돈을 쓰지 말고, 몸을 쓰는 게 좋다. 걷기와 자전거 타기가 좋은 대안이다.”(196쪽)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시대 모든 연인들이 연애와 쇼핑 사이의 은밀한 공모 관계만 해체해도 신자유주의 체제는 휘청거리지 않을까?”(198쪽)라는 재기발랄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이상형을 조건화하여 찾아다닐 필요는 없다. 키 180cm 이하는 다 루저, 차는 중형 세단급 이상이어야 하고, 얼굴은 어땠으면 좋겠고, 학벌은 이 정도는 되얄 것이고, 등등. 다 쓰잘데기 없는 얘기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번식을 위한 결합을 따지는 짓이다. 평소 몸과의 대화에 문제가 없다면, 시절인연의 운명적 마주침에 몸이 먼저 요동을 치며 확신을 할 것이다. “인연의 형성 자체가 자신의 몸이 불러오는 것”(152쪽)이다. “리듬의 거품을 빼면 강도는 절로 확보가 된다. 일상은 물론, 한 순간 한 호흡도 낭비하지 않으며 산다. 몸과 마음, 말과 행동 사이에 완벽하게 상응을 이루게 된다. 이를 일러 삶의 진정성이라 한다.”(229쪽) 정말 사랑을 하고 싶다면, 이 ‘삶의 진정성’을 찾으면 된다. 물론 쉽지야 않은 일이다.

저자가 옮긴 루쉰의 글을 나도 따라 옮기면서, 이 뜻모를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녀는 벌써부터 아무 책도 읽지 않았고, 그리하여 인간의 생활에서 첫번째가 삶을 구하는 것임을 모르고 있었다. 이 길을 개척하려면 반드시 손을 맞잡고 함께 나아가거나, 또는 홀로 분투하여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 남의 옷자락에 매달리는 것만 알게 되면 비록 전사라 하더라도 전투를 할 수 없게 되고, 함께 멸망할 수 밖에 없게 된다.
― 루쉰,「傷逝(죽음을 슬퍼하며)」

테너를 빌려줘

어제, 대학로에서 봤다.

연극+뮤지컬+오페라, 라는데 그게 말이나 되는 건지…. 그냥 재밌게 봤다. 배우들이 노래를 잘하긴 했다.

무려 4년 전에 무악극장에서 공연할 적 생각이 났다. 아무리 승진을 해도 평생 ‘조’연출일 은영의 연기지도 및 연출에 따라 몇 달을 준비해서 공연을 올렸드랬다.

새 친구도 만나고 평생에 또 없을 듯한 연기 경험도 하고 떠올리기만 해도 나자빠지며 웃음이 터질 재미난 에피소드도 얻었다. 고맙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또 얼마 전에는 귀가하다가 문득 2006년 12월에 중국 하이난에 다녀 온 일이 생각났다. 대뜸 소윤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라삐 야 야 야 라삐 야”를 불렀다.

그런 즐거운 시절을 공유할 누군가가 있기에 참 행복했다.

나의 신앙

생활이 워낙에 단조로우니 특별히 할 얘기도 없고 깊게 공부하는 것도 없고 공부하는 게 있다고 한들 여기서 남들과 나누는 게 그닥 의미있게 여겨지지도 않고 그래서 잡소리나 조금 끄적거릴까 한다.

모르긴 몰라도 2011년이 끝날 때까지는 아무래도 이렇게 살아야지 않을거나 싶다. 꼭 지금 내가 처한 상황 때문도 때문이지만, 요새 들어 내 삶의 가치관이 서서히 변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나는 인격신의 존재는 믿지 않는다. 있다 없다가 아니라 그냥 안 믿는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닮았다는 얘기도 믿지 않는다. 어떤 말씀에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그건 그저 ‘우상’을 섬기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동일시의 욕구일 뿐이다.

또한 ‘신의 의지’라는 것도 믿지 않는다. 그런 목적론적 세계관 자체를 의미할 수 없다. 짜라두짜가 마을로 내려오면서 얘기하지 않았나, “사람들은 아직 신이 죽은지도 모르는 모양이야!”

혹자는 이렇게 묻겠지, “그럼 너는 이 세상에 왜 왔냐?”, 고… 그건 아 글쎄 아바이 날 낳으시고 어무이 날 기르셔서 이렇게 됐지, 그걸 나한테 물어서 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모르면 모르는 채로 있으면 되지. 그 우주적 허무감이 유발하는 ‘구토’질을 잠시도 참지 못하고, 결국에는 신적 존재에 의지하고야 만다. 허무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든 신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한다. 이래도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 아니라고?

우린 그냥 나서 그냥 죽는다, 이걸 인정하기가 그렇게나 버거운 일인가? 인류의 조상은 원숭이다. 이게 그렇게 역겹나? 역겹기로는 인류가 자행한 일들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는데도?

형식이나 의식에 치우치는 종교는 대부분 ‘우상화’의 결과이다. 자본주의 사회라서 어쩔 수 없다지만, 나는 돈이 오고 가는 종교는 믿지 않는다. 그건 종교가 아니라 장사에 불과하다. 장삿속을 신의 뜻으로 교묘하게 포장한 것이다.

경전을 교조적으로 해석하는 것 역시 역설적이게도 경전의 ‘우상화’에 지나지 않는다. 교리의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도 얘기해보고 싶지만… 공부가 부족하지 그냥 넘어간다.

우짜쓰까. 우리가 신에게 매달리는 순간 우리는 언제나 우상화의 함정에 빠지게 될 뿐이다.

종교의 순기능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자본주의 발전이 고도화 되면서 아예 대놓고 물신을 숭배하며 배금주의자로 사는 부류가 등장하고 있는 판국이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언제나 존재했던 부류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현대의 종교가 대체로 억견일 뿐인 교리해석을 강요하기 보다는, 인간 개개인의 ‘영적 성숙’을 도와야 한다고 본다. 예수나 석가, 공자, 무함마드 등으로 나뉘어 있지 않고 이 모두를 하나로 엮으며 절로 높아지는 그런 종교의 단계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神, God이자 god, 알라)은 도처에 있다.” 굳이 말하자면, 이게 나의 신앙이다. 내게 신은 하나이자 전부로 있다. 신은 나를 위해 있는 것도 아니요, 인류를 위해 있는 것도 아니요, 있다면 인류를 포함한 우주 전 존재를 위해 있는 것이다.

오산

오산에도 눈이 많이 왔다. 통계적으로 비나 눈이 적게 오는 곳이고 그래서 비행장이 들어선 것일텐데 아무튼 입이 쩍 벌어질 만큼 많이 왔다.

군대 + 눈 = 제설. 낭만 따윈 없다.

수시로 병사들 더러 눈 치우러 나오라는 방송을 했다. 하다 하다 안 되니까 자기 계급 밑으로는 다 튀어나오라, 는 듯한 뉘앙스의 방송까지 했다. 절박한 모양이었다.

결심을 받으세요

“결심(決心)을 받으세요.”란 표현을 종종 듣는다. 말인즉슨, 어떤 결심이든 내리기만 하면 그대로 하겠다, 라는 뜻이다. 당신 뜻대로 하세요, 니 마음대로 하세요, 랑은 또 다른 얘기이다. 당신의 결정대로 나 또는 우리가 하겠다는 말이니까.

이 세상에 내가 마음을 정한다고 해서 자연히 이뤄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일찍 일어나야지, 마음 먹어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다. 아무리 결심(結心)을 해도 내가 실행하지 않으면 그 매듭은 맥아리 없이 풀려버린다.

대학 다닐 때도 고시공부에 대한 생각은 많이 했다. 그건 그저 공상이었지 결심은 아니었다. 그 공상이 후순위로 밀리고 밀린 건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앞세운 탓이겠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하기는 싫지만 해야 할 일을 감내해야 한다는 역설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냥 하면 된다. 이게 결심을 실현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허나 이건 어디까지나 고립된 개인에게나 통용되는 방식이다. 로빈슨 크루소나 척 놀랜드의 삶이다. 자유지상주의자의 세계에서나 써먹을 수 있는 방식이다. 만약 타인의 존중과 사회의 인정까지도 바란다면, 그것으론 부족하다.

하고 싶은 일을 더 멋지게 해내는 법. 나는 이제 그걸 배우고 싶다. 누군가는 “바로 그게 니가 말하던 ‘세상과의 타협’이다.”라고 되받아칠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지금 내가 서 있는 지점은 그렇다는 말이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