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Black, 2005)

영화 <블랙>을 봤다. 헬렌 켈러와 앤 설리반 선생님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아 제작됐다고 한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가 매우 사실적이라 시시한 얘기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꽤 몰입했다.

앞을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어 ‘암흑’에서 살아가는 미쉘. 가족들은 그녀를 사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내버려둘 뿐이다. 미쉘의 허리에는 방울이 매어있다.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핑계이다. 여차하면 미쉘을 ‘시설’로 보내버리려고 한다.

사하이 선생님은 마치 ‘마법사’처럼 그녀를 암흑에서 ‘빛’으로 끌어낸다. 그는 미쉘이 변할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의 교육법에 대한 확신 그리고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미쉘에게 사물과 세계를 개념화, 언어화하는 법을 익히게 한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사하이 선생님은 미쉘의 그림자가 되어 배움을 돕는다.

“Seeing is Believing.” 이는 서구 근대를 지배한 실증주의의 핵심교리이지만, 미쉘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자신도 꿈꿀 수 있다며 항변한다. 그러나 연이은 낙제, 낙제. 설령 머리로는 답을 알더라도 점자 타자를 치는 손은 턱없이 느리다. 늙어가는 사하이 선생님과 지쳐가는 미쉘. 그러나 또 한 번의 실패를 “축하”한다. “넘어져야 더 멀리 뛸 수 있다”며 서로 위로한다.

암흑은 모든 것을 품는다. 또 모든 것을 잉태한다. 암흑은 무한한 가능성이다. 성취이다. 미쉘과 사하이가 그토록 원하던 졸업 가운도 검은색이다. 미쉘은 ‘앎’이라는 빛을 통해 자신의 암흑을 긍정하고 극복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 장님이 아니던가요!” 진정한 의미의 개안(開眼)이다.

반면, 미쉘에게 빛을 가져다준 장본인인 사하이 선생님은 알츠하이머병을 앓으며 하나 둘 씩 잊어간다. 서서히 어둠으로 빠져든다. 사하이 선생님은 미쉘을 떠나며 “암흑이 너를 집어 삼키려 해도 계속해서 빛을 향해 가라.”고 주문한다. 미쉘은 “거미가 집을 짓고, 개미가 산을 건너고, 거북이가 사막을 건너듯” 마침내 대학을 졸업한다.

<블랙>은 2005년에 제작됐다. 이 영화는 인도 최대의 영화제인 Fair One Filmefare Awards에서 11개 부문을 휩쓸기도 했다. 그래도 발리우드 영화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성공이 없었다면 국내 개봉은 힘들었으리라….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내게 빛을 안겨다 준 ‘나의 선생님들’을 마음속 깊이 그렸다.

여담으로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헬기를 타고 내려왔던 ‘유명 배우’를 기억하는지? 어린 주인공이 그를 보기 위해 똥통에 빠지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 유명배우가 바로 아미타브 밧찬이며 이 영화에서 사하이 선생님으로 열연했다. 인도의 ‘국민 배우’라고 한다.

『프랭클린 자서전』 (벤자민 프랭클린, 2009)

벤자민 프랭클린의 삶에서 본받을 점이 있다면, 그는 허황된 이론가가 아닌 견실한 실천가였다는 사실이다. 좋은 아이디어를 생산해내고 퍼뜨리는 이들은 종종 있어왔다. 그러나 그는 그에 그치지 않고, 절제, 근면, 진실, 겸손의 실천을 통해 ‘현실화’ 해냈던 것이다.

특히 타인을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않는 것, 비밀모임을 통해 자기발전과 상호부조를 도모한 것, 공공사업 추진에 있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은 것, 쓸데없는 논쟁은 가급적 피하려고 한 것이 주요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타고난 성정, 즉 지적교만으로 논쟁을 통해 남을 굴복시키려는 욕구를 긴 세월의 훈련을 통해 억누르고 좋은 습관으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자신이 지닌 것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더 나아지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2007)

내가 이 책에 대해서 뭔가를 쓴다는 것 자체가 조심스럽다. 나는 그냥 내 글을 읽는 이들이 이 책을 한 번 읽어봐 주기를, 아이티란 나라와 아이티 민중의 삶에 대해 한 번 생각해봐 주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티는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과 함께 중남미에 위치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중 유일하게 프랑스 식민지였으며, 최초로 독립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 책을 쓴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는 카톨릭 사제로 긴 독재 이후 최초의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채 1년도 되지 않아 군부 쿠데타로 축출 당했다가 국제적인 압력의 도움으로 다시 복귀했다.

그 뒤로 다시 한 번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그가 주장하기로는 미국에 의해 납치되어 남아프리카에 정착하게 됐다. 미국을 위시한 IMF, 세계은행이 요구하는 것들을 순순히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책에 대하여 적다보니 결국 저자에 대해서 자세하게 적게 됐지만, 사실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대다수의 아이티 민중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이 책은 선진국 대열의 막차에 올라타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어느새 ‘욕망하기’, ‘더 많이 갖기’에 익숙해져버린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차분히 보여주기’의 방식으로 나의 삶을, 우리 사회를 돌아볼 기회를 갖게했다.

“죽음과 죽음 사이의 선택”의 처지에 놓인 가난한 이들의 삶이 어떻게 보다 발전했기에 더욱 문명화 된 사회에 살고 있는 나를 꾸짖을 수 있을까? 북유럽 모델, 그게 안 된다면 미국 모델이라도 열심히 따라가야 할 우리가 어째서 아이티라는 나라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하루 1달러 미만을 쓰면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다. 한 사람 밖에 누울 수 없는 공간에서 두 사람이 살기란 불가능한 것 같다. 그러나 저자는 가난한 이들은 “제 3의 길을 창조하는 데 오랜 경험을 갖고 있다”고 한다. 부족한 것은 서로 나눈다. 한 사람 밖에 누울 수 없다면 교대로 잔다.

가난한 사람들은 날마다 죽음과 맞댄 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있습니다. (…)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은 다른 나라들의 원조나 도움 덕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 가난한 사람들, 그들이 살아 온 역사는 일종의 인간애의 박물관 입니다.

가난한 나라를 구제할 방법은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IMF나 세계은행, UNDP와 같은 국제기구를 통한 원조를 거론할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정치적 고려’가 없는 ‘경제적 원조’는 없었다. 스티글리츠가 자신의 저서 『세계화의 덫』에서 비판했듯, 국제기구들은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크리올 돼지라는 아이티 토종 돼지가 있‘었’다. 작고 검은 이 돼지는 아이티 농촌 경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었다. 아이티 기후와 조건에 잘 적응했으며 무엇보다 사흘을 먹이지 않아도 죽지 않는 생명력이 강한 녀석이었다. 아이티에도 우골탑과 비슷한 말이 있었을 것 같다. 아이티 사람들은 크리올 돼지를 팔아 아이들 학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 돼지들은 1982년에 씨가 말랐다. 돼지 콜레라라도 돌았을까? 아니다. 그저 전염병이 돌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모조리 도살했다. 이 만행은 국제기구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물론 크리올 돼지보다 더 나은 돼지를 준다는 조건이 있었다. 더 나은 돼지들은 미국 아이오와 주에서 들여왔다.

이렇게 들여온 돼지들은 인구의 90%가 겪고 있다는 아이티의 식수난에도 아랑곳 않고 깨끗한 식수를 마시셔야 했으며 90달러 씩이나 하는 수입 사료를 드셔야 했을 뿐더러 덮개가 있는 우리에서 주무셔야 했다. 아뿔싸! 맛도 지지리 없었다. 오죽하면 아이티인들이 이 돼지들을 “네 발 달린 왕자”라고 불렀을까.

가난한 이들,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 국제사회 차원의 지원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결국 ‘어떤 방식으로?’에 있는 것 같다. 못 먹고 못 입는 이들에 대해 막연한 동정심을 갖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필시 ‘동정심’은 국제사회로의 어마어마한 원조금이 모일 수 있는 강력한 원인일 것임에도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필요한 집과 일자리, 학교 등록금을 대 줄 만큼의 돈은 없습니다만, 우리 모두가 응당 받아야만 할 존경과 존엄으로 서로를 대할 만큼의 인간다움은 우리에게 충분히 있습니다.

경제학자 이정전이 쓴 『우리는 행복한가』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행복’이란 개념을 과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이정전 교수는 숱한 인문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이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라는 핑계로 외면해왔지만 심리학자와 자연과학자들의 행복에 대한 연구 성과를 보면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돈이 없으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두 명제는 일견 파라독스 같지만 “돈이 없으면 못 살겠지만 돈이 전부는 아니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루 1달러 미만을 쓰며 살아가는 ‘절대 빈곤층’이 대다수인 아이티 사람들은 불행해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행복감은 어느 정도 상대적인 것이라 ‘타인과의 비교’에도 영향을 받으므로 대다수가 가난한 아이티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행을 체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런 단순한 이유에서 마냥 그들을 동정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이티에는 ‘아이티 사람들은 축제를 돈과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 춤추고 노래할 때 아이티 사람들은 속이 빈 악기가 아닙니다. 아이티 사람들의 문화가 그 목소리와 춤을 통해 울려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자기 뿌기를 기꺼이 떠안으면서 스스로를 다시 긍정합니다.

나는 이 말에서 영혼의 울림을 느낀다. 인간의 존엄함, 인간다움이 살아있는 사회의 면모를 엿본다. 오히려 작금의 한국 사회에는 자기 뿌리를 뽑혀버린 채로 더는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는 이들만 넘쳐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제 3의 길’로서 사랑과 우정, 환대가 넘쳐나는 ‘존엄한 가난’을 택할 순 없을까. 전근대로의 회귀가 아닌 공동체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꿈꿀 순 없을까.

나로서는 아직 결론을 못낸 물음들이므로, 이 책을 쓴 이의 말을 인용하며 마지막을 맺고 싶다. 그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어떻게 칭하고 있는지 유의하며 읽어주면 좋겠다. 참고로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은 각각 이 세계 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최상위계층과 절대 빈곤층을 이루고 있는 최하위계층을 뜻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념 덕에 도전이 이루어지는 그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 신념, 이 확신이야 말로 우리가 전 세계에 드릴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수출품이 아닐까 합니다. (…) 저와 당신은 함께, 같은 손의 손가락처럼 이 새로운 세계에 더 인간다운 세계를 만들라는 요청을 받고 이습니다.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이 좀 더 가까워지고, 그래서 주먹을 쥐었을 때 더 강력해지는 그런 손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저는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