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생신

어제는 어머니 생신 날이었다.

분명히 스케줄러에 적어놓았는데, 새벽에 귀가해서 오후께나 잠에서 깬 덕에 종일 정신이 없었다. 희망청도 빠듯하게 도착했고, 미팅 끝나자마자 인터뷰 도우러 연대 동문 쪽에 왔다가 진곤형 만나러 다시 이대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시 신촌.

그러다가 어머니 전활 받았다. “아들, 오늘 엄마 생일인 거 알고 있었어?”

아뿔싸. 지금껏 해드린 것도 없고, 해드릴 수 있는 것도 별로 없고… 오늘은 꼭 먼저 전화해서 축하하고 싶었는데…. 부끄러운 마음으로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죄송하고 사랑한다고, 생신 축하한다고. 앞으론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답하겠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아들 너 잘하고 있어. 엄마는 우리 가족 행복하면 축복이란다. 아들 축하받으니 정말 기뻐. 잘자.”라고 답해주셨다.

어무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십시오.

졸업 즈음, 희망의 증거

졸업즈음 글 한 편 쓰겠노라 생각하고 있다.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할까, 일기처럼 쓸까, 소설로 쓸까, 시로 쓸까… 형식이야 어찌됐든 내용은 ‘정리’가 될 것이다. 무엇을? 나의 지난 4년 6개월의 삶을…

졸업을 하고 군입대를 하게 되는 것은 앞으로의 삶에 실제적으로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모르겠으나, 지금으로선 썩 만족스러운 수순이다. 어쨌든 확실히 정리가 되는 것이니까.. 객관적인 정리는 그렇게 되고, 나는 내 나름의 주관적 정리를 해야한다.

떠날 때가 되니 더 많이 주지 못한 것이, 나누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게 느껴진다.

대학생활 내내 알게 모르게 선후배, 동기, 스승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꼬집어 누굴 언급하는 것은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고… 아무튼 그들로부터 지적 자극, 삶의 방법, 호연지기, 용기, 지혜를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언제나 나는 성취, 성공보다 실수, 실패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나를 든든하게 받쳐준 이들 덕분이다. 헌데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나?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러운 대목이다.

꼭 대학에 왔어야 했을까?

지금이야 다른 선택도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만, 진학을 결정할 당시에는 이런 질문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시간과 돈, 땀을 쏟아서 수험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일단은 가보자”라는 생각이 가장 컸다.

왜 꼭 연세대학교였나?

역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여느 대한민국 고3들처럼 손에 쥔 성적표를 들고 합격을 기원하며 원서를 넣었을 뿐이다. 입학하고서는 다른 궁리할 여지 없이, 어쨌든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며 열심히 생활했다. 지난 4년 6개월의 시간에서 내가 성장할 수 있었다면, 그건 다 이 대학이라는 공간과 이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다. 진심으로 감사한다.

대학에 와서도 여전히 부모, 친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타지에서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정신적·관계적 의존도는 자연스레 낮아졌지만, 여전히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아마도 무의식에 각인됐들 정서적 울타리 덕분에 자기파괴적 생활도 아주 짧게 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딘가 썼는데, 한 때는 ‘부모 때문에 산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여전히 내가 지닌 문제의식 태반은 부모로부터 기인하는 것이긴하다. 대학에서의 공부, 생활은 이 문제의식을 보다 객관화, 일반화해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이제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나의 부모들’을 위해서 살 것이다. ‘그들’이 곧 ‘나’이기 때문이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노무현의 낙선과 이후 유시민의 개혁당 창당. 당시 넷키드였던 나는 예민하게 이 사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정서를 누구보다 공감해줄 것 같았던 아버지께 이메일로 당시 인터넷에 떠돌던 동영상과 글들을 모아서 보냈다. 돌아온 것은 전혀 예상밖의 호통이었다. “공부나 해라!” 지금은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지만, 당시의 나는 너무나 서러워서 혼자 끅끅 울었다.

대학에 입학하고서도, 건강관리 다음에는 “우선 실력을 키워라!”라는 질책을 가장 많이 받았다. 대학 입학 후에는 더 기고만장해서 대들었고, 대구에 내려갈 때마다 조용히 지내긴 힘들었다. 그러고 서울에 돌아와도, 용돈은 제 날짜에 꼬박꼬박 입금해주셨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시다. 지금은 내가 먼저 내 앞가림에 신경쓰고, 내 삶에 책임을 지려고 하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격한 대립은 없다. 이제는 그냥 져드리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도 하고, 부모가 나를 품어주었던 것만큼 내가 보듬어 안아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 아무래도 물질적 보답은 별로 자신이 없다. 그러나 부모가 몸소 가르쳐 준 바, 물질적인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사회계열로 입학해서 굳이 정치외교를 전공으로 선택한 이유는 “‘정치’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금은 그 정도로 순진하진 않다. 정치, 특히 한국에서의 정치는 늘 ‘소수’를 위한 것이었고, 그것이 마치 ‘다수’를 위한 것인양 포장되어 왔을 뿐임을 안다. 이제 정치는 ‘희망’과 함께 말하기엔 어색한 것이 됐고, 오히려 ‘인민의 절망’과 더욱 친화력이 있다는 것도 안다. 아무튼 목적이 있었던 바, 현실 동학을 보는 비교정치 보다는 정치 규범을 정초하는 정치철학, 정치사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국제정치는 흥미도로 따지면 그만한 재미가 없으나 현실 영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됐다. 정치경제를 접한 이후론, 경제도 함께 공부하면 목적한 바에 더욱 부합하겠다 싶어 경제학 이중전공을 결심했다. 그 결과가 썩 개운한 것은 아니었지만, 좋은 선생님들로부터 새로운 시각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열심히 공부했노라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라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학기 중에 정말 많이 나돌아다녔다…) 대학에서의 공부가 삶에서, 현실에서 그렇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내 결론이다. 학문의 종속성과 식민지성, 보수성… 그럼에도 그 속에서 희망을 본다면, 역설일까? 지나친 낙관일까?

대학을 졸업하는 마당에, 베베 꼬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입학할 때처럼 냉소적인 채로 머물러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책상물림만 하지 않고 많이 부딪히고 깨지고… 험한 꼴도 봤지만, 덕분에 쉽게 접할 수 없는 속살들을 맛보았다. 오호라… 더 많은 삶의 면면들을 들여다보는 일에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다. 때론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이 훨씬 많았다. 물론 대다수는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살아간다.

배움을 구하는데 적극적이었던 덕에 더욱 많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위에 있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그런 기운들… 정말 좋은 기운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래, 이 사람들이 희망이다… 그리고 또 어디엔가에도 이만한 사람들이 꿋꿋이 제 삶을 꾸려나가고 있을 것이기에… 나는 그들의 걸음이 더디겠지만 온전하기를 바라며 소박한 기도를 품는다.

다른 삶은 가능하다는 자신감과 믿음, 몇 번의 실패에도 기어코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걸어가는 용기와 열정, 지속 가능성을 위한 상상력과 흔들리며 걷기 위한 끊임없는 자기반성…. 삶의 실험, 삶의 시험은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기필코 ‘삶’으로 증명해내리라, 다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빚어내는 예술가이다. 나는 내가 先生들을 통해 배웠던 또 느꼈던 ‘희망’을 내 주위와 내 다음 이들에게 전달하고 싶다. 나 역시 하나의 희망의 증거로서.

인투 더 와일드 (Into the wild, 2007)

“HAPPINESS ONLY REAL WHEN SHARED.”

한 줄기 빛, 창백한 얼굴, 눈 감던 마지막 장면이 도통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허구와 가식이 판치는 세상에서 우리는 늘 진실한 것을 갈망한다. 참된 것을 갈구한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이 갈증을 젊은 날의 치기 따위로 여기며 아주 서서히 세상과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한다. 혹은 더욱 냉혹한 진실에 굴복하고 만다.

스스로 비겁하다고 느끼지만 “사회” 속에서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사회, 그놈의 사회!

사회를 벗어난, 사회가 아닌 야생. 그곳에는 진실함이 있을까? 그곳에서는 참된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크리스토퍼 존슨 맥켄들리스는 자신에게 알렉산터 슈퍼트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야생으로 향한다. 목적은? 살기 위해서.

그래, 단지 야생에서 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