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정치』 (막스 베버, 전성우, 나남출판, 2007)

여전한 설레임과 서늘한 통찰을 주는 글이다. 가장 힘빠지는 대목은 “이 문제는 우리의 중요 관심사가 아니므로 다음에 다루도록 한다.”는 것이다. (계속 공부해야 하고, 그러나 그것까지 다루면 논점이 흐려지기에 다음에….)

그렇게 해서 달려간 종착점에서는 직업 정치가가 가져야 할 요건이 기다리고 있다. ‘비창조적 흥분 상태’와 구분되는 ‘객관적 태도’로서의 열정, 그리고 책임의식, 마지막으로 이 둘을 가능케 할 균형감각이 그것이다.

직업 정치가라면 자신의 내적 기반 ― 즉, 신념 ― 에 의해 행동하되, 자신의 행동에 의한 결과까지도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베버가 강조해마지 않는 책임윤리이다. 반면, 신념윤리는 자신이 가진 신념만으로 정당하며 그 결과는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직업 정치가가 베버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정치 영역에 헌신하고자 한다면, 그는 그 속에 숨어있는 악마적 요소들에도 민감해야 한다.

트로츠키의 말처럼, 현대 국가는 폭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하고 있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때론 수단이 정당화 될 수도 있다. 아니. 베버는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이 정당화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목적의 달성, 즉 자신이 실행한 바에 따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념윤리란 마지막 순간에 개인적 소회를 통해서 드러나야만 가치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념윤리가 없다면, 헌신과 열정은 생기지 않고 허무한 껍데기 속에서 공허함을 느낄 뿐이다. 고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는 상보적 관계에 있다. 가슴 깊은 곳에는 신념윤리를 간직하되, 행동에 있어서는 책임윤리를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

베버는 ‘나이든 이’로서 경고한다. “10년 뒤에 어디 두고봅시다”라고. 내 강연을 듣는 이 중에 몇이나 여전히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책임을 갖고 살고 있을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정치의 영역에 뛰어들기 보다는 평범한 시민으로 행복하게 살았으면 낫지 않겠냐고…. 그럼에도, 자신이 정치에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두꺼운 널판지를 뚫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늘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도전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현재로서 가능한 것조차 달성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dennoch!)의 자세. 직업 정치가, 소명을 가진 정치가에게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해야만 하는 때는 “바로 지금!”이다.

부차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현대 정당 발전 과정에 대한 베버의 사회학적 통찰 역시 새겨둘만 하다. 특히 코커스(caucus), 전당대회와 같은 ‘기계’(machine)의 등장은 ‘대중적 독재자’의 출현을 초래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영혼이 없는 명망가 정치가 득세하게 될 뿐이라는 분석은 모종의 이분법으로 우리의 선택을 종용한다. 현대 정당체제에서 정말로 주어진 선택지는 그 둘 뿐인가? 어쨌든 한국의 경우는 전자에 더욱 가까운 것 같다.

또한 대체적으로 직업 정치가는 변호사이거나 저널리스트, 이익집단, 당 관료 등으로 시작하는 편이 좋다고도 덧붙인다. 변호사는 자신의 고용인을 위해 질 법한 일도 이길 수 있는 논증을 퍼부으며, 이길 수 있는 일은 더 잘 이기도록 하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다. 직업 정치가의 중요한 자질인 연설 능력, 글쓰기 능력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널리스트의 경우에는 글쓰기의 능력이라는 부분에서 주목 받으나 ‘글쟁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고, 당 관료는 ‘정치꾼’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이익단체 소속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현대로 올수록 저널리스트는 점점 정치에 의존해서 살기 힘들어진다는 점에서 이익단체 활동을 통해 정치 영역에 입문하는 것은 바람직한 경로라 하겠다.

베버는 정치, 정당 제도로서 외적인 요건이 가지는 특성과 직업 정치가의 내적 자질에 대해서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 제도적으로는 어쩔지 몰라도, 영국의 경우에는 의회 정치가 발달하고 독일의 경우에는 관료 정치, 미국의 경우에는 대중적 독재가 가능할 지 몰라도, 어쨌거나 직업 정치가의 자질을 따질 때는 ‘윤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좋거나 싫거나 직업 정치가의 손에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릴 지렛대가 쥐어져 있다. 이 수레바퀴를 아무나 굴리게 할 수 있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직업 정치가에게 책임윤리를 강요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애시당초 이 무거운 질곡을 견뎌내지 못할 사람이라면 그 영역에 뛰어드는 것 자체를 만류해야 한다.

현대 정치 제도에 대한 것으로 출발한 베버의 강연은, 결국에는 청중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이 정말로 직업 정치가로서의 자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시길 바라오.
비창조적 흥분 상태를 열정으로 오해하지는 않고 있는지,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말이오.”

삶이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삶이란 게 그렇게 단순한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삶이란 단선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 살아본다고 해서 명료하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를 좀 알겠다 싶을 때는 이미 은퇴할 때이고, 그렇게 되면 좀 더 과감하지 못했던 용기를 내지 못했던 과거를 후회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우리가 ‘다름’을 불편해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지금껏 애써 깔아놓은 전제를 위협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지만 정말로 진지한 성찰을 거쳐 튼튼히 쌓아올린 축대라면, 어떤 ‘다름’의 도전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응전을 통해 더 견고해진다. 독선일까? 반증주의를 주창한 칼 포퍼도 어느 정도는 독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차라리 독선적이어라! 어설픈 박애주의자보다는 낫지 않은가?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데 대한 독선이라면, 좋은 말로 ‘용기’라 불러줄 수도 있을 텐데, 얼마든지 좋으니 독선적이어라!

이왕 포퍼를 말한 김에, “소싯적에 맑스주의자 아니었던 사람 있나? 그런데 나이가 먹어서도 맑시스트로 산다면 그건 정말 멍청한 짓”이라던 그의 말도 도마 위에 올려보자. 다시 한 번, 삶이란 단선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상 자신이 지나온 과거를 얘기하면서 부풀리는 것도 모자라 엄살을 피우기 마련이다. 아, 그놈의 엄살! 변절, 변심을 어떤 식으로든 합리화하기 위한 그 죽일 놈의 엄살! “나도 한때는 그랬는데 말이야…”, 당신이 한때 그랬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와 같은 과거를 가졌던 사람들이 끝내는 대부분 현실과 타협하여 낙오자로 자신들의 과거를 후회한다고 해서, 우리가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데 주저할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고? 역사는 오히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고, 살기 위해 최소한의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하여 당연히 ‘자기 뒤치다꺼리’는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한다. 정신적 독립을 원한다면, 신체적으로 경제적으로 먼저 독립해야 한다. 섣불리 부모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다면, 평생 기대 수익은 좀 낮아지겠지만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 이 지구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면적, 부피만큼을 오롯이 책임진다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아뿔싸! 짜릿함의 순간은 짧고, 인생은 긴 것일까?

‘현실 vs. 이상’의 이분법은 삶의 다양한 측면을 생략한다. 이상을 좇으며 사는 사람은, 현실적인 사람보다 더 어리석은가? 다시 말해, ‘아직 어려서 뭘 모르는’ 것일까? 이 물음은 여전히 양적인 경험을 척도로 삼고 있다. 이건 결국 나이 권력으로 위에서 찍어누르는 것 이상이 되질 못한다.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를 틀어막는다. 암튼 나이 드신 어르신이 삶의 철학 얘기하실 때에는 조용히 숨죽이는 게 최선이다. 이미 삶의 바탕이 되는 사회/경제적 조건은 천지개벽 수준으로 바뀌었는데도 말이다.

“정말 이게 행복한 삶이라 확신하니?”, 이 물음에 그 누가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으랴! 다만,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는 이들에게 숙연한 박수를 보낼 수 있을 뿐이다. ‘내 비록 내 앞가림에 허덕이느라 도움은 못 주지만 끝까지 응원하겠소’, 속으로 되뇔 수 있을 뿐이다. 세속적/물질적 기준에서 보면 한없이 가련하고 비참하겠지만, 정신적 성취란 어쩌면 물욕物慾과 반비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건, 정말로 고매한 정신의 승리일까 아니면 덜 익은 포도에 대한 아Q의 비열한 정신승리법에 불과한 것일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삶이란 정말로 단순한 것이 아니며 언제나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확실한 것보다 불확실한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비극은 인간의 오만함hubris 위에 똬리를 틀고 앉아 호시탐탐 우리의 뒤통수를 노린다. 그렇다고 도망갈 것인가? 살기로 결정한 이상, 담대하게 맞서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다. 이런 점에서 어떤 삶을 추구하건 간에 우리는 모두 다 같이 불쌍한 존재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