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파괴적 생활에 대한 뒤늦은 반성

요즘들어 부쩍 겨울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겨울을 느낀다는 건, 기후적이나 생리적인게 아니라 순전히 심리적이고 기억의존적인 판단에 가깝다. 가만히 있어도 지난 겨울의 기억들이 되살아날 때, 비로소 겨울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거의 완벽에 가까웠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아침 수영을 가지 못했다. 강습이 7시 시작인데, 7시 즈음에 정신이 들었다가 끝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1시간 반 정도를 자버렸다. 다행히 계절학기 수업에는 늦지 않았다. 늦게 일어난 것은 전날 늦게 잤기 때문이긴 한데, 정확히 말하면 안 잔 것이 아니라 못 잔게 맞다. 자정 조금 넘어서 누웠는데, 잡생각이 설쳐대는 바람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의 이 짧은 사건이 지난 겨울의 기억을 강하게 끄집어냈다. 구석 깊이 봉인해뒀던 패배의 기억이 마지못해 끌려나왔다.

지난 겨울, 나는 토플 준비를 하기 위해 2호선 삼성역에 위치한 ‘이름난 어학원’을 다녔다. 왜? 그냥 다들 좋다길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매일 이른 6시 20분에 수업이 시작하는데, 늦지 않게 가려면 이른 5시 정도에는 기숙사를 나서야 무사히 지하철 첫차를 탈 수 있었다. 일어나는 일도 버거웠지만, 기숙사 출입 자체가 5시 30분부터 가능했던지라 부득이 경비원 아저씨의 달콤한 잠을 방해해야했다. 사실 첫차를 타도, 여유있게 교실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교실 맨 끝자리에 간신히 앉았다.

이 생활의 가장 큰 적은 ‘졸음’이 아니라, ‘허기짐’이었다. 아침을 거르는 건 당연했고, 어떤 방법으로도 ‘느긋한 식사’는 불가능했다. 지하철에서 삼각김밥과 우유를 우걱우걱 먹어댈 수 있으면 양반이었고, 그럴 여유가 없던 날에는 수업 쉬는 시간에 근처 편의점으로 뛰어가서 황급히 배를 채웠다. 수업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빵을 사먹었던 기억도 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버스에 쭈그려 앉아 입에 넣긴 했는데, 이게 소화가 되고 있는지 어떤지 별 대책이 없었다. ‘허기짐’을 채우면, 그제서야 ‘졸음’이 밀려왔기에 먹고 나서는 창틀에 기대서 잠을 청했다.

아! 더이상 눈물이 나서 적기 힘들지만 어쨌든 시작했으니까 끝까지 마무리를 짓자면, 방에 돌아와서는 더 가관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일단 한 숨 자고 나면, 저녁 먹을 생각은 싹 사라지고 ‘내일은 또 어떻게 일어나냐’, ‘또 아저씨 깨우기 정말 죄송한데….’, ‘아, 배고프겠다’ 등등 별 잡생각이 다 떠오른다. 이런 생활이 한 며칠 이어지니 자연히 몸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고, 학원을 빼먹는 날도 늘어갔다. 감기는 기본 옵션으로 따라다니고 몸도 붓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다른 방법을 모색했으면 됐는데 끝까지 미련한 오기를 버리지 못했다. 한 달 더 다녔다.

우습게도 ‘자기 파괴’를 ‘자기 극복’인줄 착각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럼, 지금의 나는 이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났는가? 뭐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조직의 재발견』 (우석훈, 2008)

책은 참 많은 아이디어를 준다. 글 쓸 일이 있으면, 우선은 책을 집는게 바른 수순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이런 과정이 도용이나 표절이 아닐까 생각을 했는데, 그런 성격의 베끼기라기 보다는 아이디어의 변용 정도라는 생각이 든다. 전혀 다른 고민을 하고 있더라도, 책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된다거나 책을 통해서 글을 쓸 힘을 얻는다거나 하는…. 결국 읽지 못하면 제대로 쓰지도 못하게 된다.

우석훈과 박권일이 쓴 『조직의 재발견』를 읽으며, 내가 몸담았던 ‘조직’을 되돌아봤다. 소위, ‘조직의 쓴 맛’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그 정도로 빡빡한 조직은 겪어본 적이 없기에 ‘쓴 맛’까지는 아니고 ‘씁쓸한 맛’을 느낀 적이 있다. 올해 여름부터 새로이 꾸리고 있는 학회의 ‘조직화’를 피하는 이유도 그 씁쓸함을 다시금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죽지만, 그럼에도 조직은 영원하다. 기업도 이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어찌보면 ‘살아남기’가 조직 자체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학회를 시작한 이유도 비슷하다. 일단 조직이 있으면 내가 없더라도, 비슷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그 뜻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 학회가 하나의 ‘고정점’으로서, 대학 사회에서 제 기능을 다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주변부적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이 고정점을 중심으로 조직을 형성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동무들을 만들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하고 있긴 하지만, ‘학회 조직화’는 이번 겨울에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 같다. 당장 내일 동계 워크샵의 주된 논제도 “어떻게 학회를 조직하고 운영할 것인가?”하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조직에 몸담게 된다지만,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 특히 대학에서 겪었던 ― 조직은 대부분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딱,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그럼 절이 떠나리?”하는 것이었다.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인데, 그렇게 떠나보내고 말 것이냐?”고 되물어도 소용없다. “아무튼 나도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니고, 이 정도는 버텨야지. 이 정도도 못 버티면 그냥 떠나라.” 정도의 답이 돌아왔으리라. 그럼, 왜 조직에서 활동을 하는가? “들어올 때, 자기가 하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란다. 결국 조직 활동의 강제성은 맺지도 않은 ‘계약’(“한다고 했으면 해야지, 왜 안해?”)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가장 씁쓸한 경험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 한 학생 조직에서 학술 행사를 진행할 때였다. 당시에 행사 일정 내내 조직위원들이 모여 심야회의를 했다. 당일 행사를 평가하고 내일 행사에 대해 간단히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데 이 시간이 생산적이었는가 하면은 절대로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는 ‘푸념’ 및 ‘윽박 지르기’가 난무하는 시간이었는데, 이걸 인정하고 달래가기는 커녕 “하기로 했으면 해야지. 왜 지금에와서 딴소리냐!”는 식의 비판이 분위기를 지배했다. 지금도 선명한 장면은 한 친구가 자신에게 과중한 업무가 부과되고 있음을 토로했고, 피로함을 하소연했음에도 “한다고 했으면 해야지.”가 반복되었을 때이다. 내가 당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 일은 나에게 ’조직화’의 스트레스로 남아있다.

지금 활동하는 학회에서도 얼른 학회장, 부학회장을 뽑고 회칙 거나하게 만들어서 본격적인 조직화의 길을 걷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제안을 하는 이들의 선의를 왜곡하고픈 마음은 없다. 그러나 지금껏 그런 조직화가 남긴 것은 조직 뿐이었다. 분명 ‘살아남기’ 자체가 조직의 근본 목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임원진을 선출하고, 체계를 쌓고, 조직을 강화하자”는 주장이 “일부 사람들에게 업무를 집중시키고, 잘하면 본전이며 못하면 책임을 묻자”는 식으로 전개되는 것을 경계해야한다.

우리 학회에는 우리 학회에 걸맞는 조직 체계가 있을 것이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야 할 부분이고,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한 학회원이 제안했던 세미나 이외의 시간에 별도의 운영위원회의를 갖자는 의견은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학회원이라면 누구나 운영위원회에 참가할 수 있다. 운영위원회의 장은 ‘추첨’으로 추대한다. 혹시 아무도 운영위원회의에 참가하지 않으려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지만, 학회 상황이 그렇게까지 악화일로를 걷는다면 운영위원회가 문제겠는가? 세미나도 제대로 돌아가질 않을 것이다.

로스트 라이언즈 (Lions for Lambs, 2007)

누가 용맹한 사자를 사지로 내모는가

정치문제는 문제의 내용을 안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누가 당사자인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E. H. Carr, 『20년의 위기』 中.

이 영화의 원제는 Lions for Lambs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장교가 멍청한 작전을 구사하는 영국군 장교를 ‘양’으로, 실패한 작전에 의해 희생당한 용맹한 영국 군인을 ‘사자’로 비유한 것에서 유래한다.

이 영화에는 소위 ‘헐리우드 리버럴’이라 불리는 감독 겸 주연 로버트 래드포드의 정치색이 짙게 배여 있다. 영화는 이라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미국, 정확히 말하면 현직 대통령인 부시와 집권당인 공화당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다.

정치는 ‘우리’와 ‘적’을 나누는 순간에 시작된다. 영화 속 공화당 상원의원 제스퍼 어빙(탐 크루즈 분)은 현실의 공화당 레토릭을 거의 완벽히 모사한다. 어빙은 이란의 핵개발을 실제적인 안보 위협요소로 상정한다. 또한 이라크가 아프가니스탄의 반미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이란의 영토를 횡단하는 전략을 감행하고 있고, 이를 이란이 용인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미국이 현재의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전략이 필요하며,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할 것”임을 피력한다.

어빙의 논리는 그의 인터뷰 하고 있던 제닌 로스(메릴 스트립 분)가 간파했듯, 지난 역사에서 숱하게 등장했던 개전/파병 논리의 반복에 불과하다. 베테랑 기자인 제닌은 어빙 의원의 논리에 쉽게 설득되지 않고 조목조목 반박하며 부실한 논리를 지적한다. 오히려 이런 제닌을 괴롭힌 것은 어빙 의원이 미디어는 “세류에 편승하는데 급급한 ‘바람개비’같다”며 비꼰 대목이다.

이 영화는 제닌 로스라는 인물을 통해 ‘정치에 휘둘리는 미디어’에 대한 고민도 드러낸다. 제닌은 신문사로 돌아온 뒤, 어빙 의원과의 인터뷰 내용에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며 기사화를 주저한다. 그대로 쓰면 특종이 될게 분명하지만, 집권당의 정치적 목적에 부역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옛 동료이자 현재의 상사는 사실보도보다 특종을 터뜨리는 게 더 중요하다며 그녀를 회유한다.

로버트 래드포드의 세련되지 못한 직설화법 영화를 2시간 여 보고 있노라면 따분함이 밀려오는 게 사실이다. 그는 이 영화를 만든 것도 모자라서 자신이 직접 스티븐 맬리 교수를 연기한다. 그리고는 관객으로 상정된 대학생 토드(앤드류 가필드 분)를 앞에 두고 대화를 가장한 설득을 시작한다. 토드는 현실 정치에 냉소적인 학생이다. 그는 오늘날의 정치는 부패하고 타락했기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실토한다. 이는 한국의 현실과도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정치 현안에 무관심하며, 사소하고 개인적인 문제에 골몰한다. 맬리 교수는 ‘자발적 무관심’이 현직 정치인에게 얼마나 이로운지 모르느냐고 다그치며, 냉소적인 태도는 단지 책임을 회피하고 현실에 안주하려 하는 것일 뿐이라고 꼬집는다.

맬리 교수와 면담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토드는 혼란스럽다. 영화를 본 관객도 불편함을 떨치기 힘들다. 교수의 입을 빌려서 나온 감독의 메시지는 헷갈리는 구석이 있기도 하다. 간교한 ‘양’들이 얘기하는 전쟁의 허구성을 비판하잔 얘기인지, 직접 ‘사자’가 되어 용맹하게 희생하잔 얘기인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3류 선전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체면을 차린 셈이다.

감독의 답은 정치에 대한 ‘참여’와 ‘관심’을 자양분으로 미국식 공화주의를 건강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감독의 답이며, 하나의 출발점에 불과하다. ‘무관심/무대응’도 하나의 정치일 수 있지만, 덕스럽진 못하다. 학생과 관객은 ‘정치적 숙려’를 거쳐 자신의 답을 찾아야 한다. 어떠한 답을 내리건 간에, 정치 참여는 기본 전제이다. ‘전쟁의 정치’를 막고자 한다면, ‘정치의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글 읽기와 삶 읽기 2』 (조한혜정, 1994)

지식과 권력은 어떤 관계인가

조한혜정 교수의 수업은 대학시절을 통틀어 제게 많은 영향을 준 강의 중 하나이다. 학생들을 방목하기 보다는 지향점이 분명하고 “놀면서 하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조한혜정 교수의 강의를 들은 덕에 이 책 1권과 2권을 구입했고, 강의 들을 당시에 1권을 읽었다. 2권은 다른 책들에 밀려 책장 맨 윗칸에 꼽혀있기만 했다. 그러다 최근에 틈틈이 다시 읽게 되었다.

2권의 주요 내용은 ‘식민지 지식인의 자기 반성’과 ‘학문, 문화의 자생력을 기르기 위한 저자의 고민’이다. 핵심 물음은 “지식과 권력은 어떤 관계인가? 누가 지식을 만드는가? 지식 생산의 주체는 누구인가?”하는 것이다.

지금껏 우리는 지식 ‘습득’에만 관심이 있었지, 지식 생산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무심했다. 주권의 종속은 끝났지만, 경제적·문화적 식민지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너도나도 트렌드랍시고 ‘탈근대’를 말할게 아니라, 여전히 (서구의 지식, 문화로부터의) ‘탈식민’이 화두여야 한다는 것이다. 종주국에서 학위를 따고 돌아온 식민지 지식인으로부터, 무비판적으로 지식 습득에 힘쓰고 있는 대학생들의 처지가 안쓰럽다.

이 책의 제4장은 대학교 1학년 세미나 첫 커리큘럼으로 써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제1장, 제6장도 훌륭하다. 탈식민론(포스트-콜로니얼리즘)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접하고 싶다면 제2장, 제3장을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여성’으로서 ‘주변적 고민’을 하고 있다면 제5장을 읽어보라. 이 험난한 남성 중심의 사회를 헤쳐가는데 든든한 우군을 확보한 느낌이 들 것이다.

책 추천과는 별개로 여담을 하나 하자면, 조한혜정 교수의 수업에서 배운 것 중 또 하나가 ‘쪽글 쓰는 법’이었다.

우선 텍스트를 읽는게 처음이고, 그 다음에 텍스트와 거리를 두면서 산책도 하고 놀기도 하고 생각을 삭힌 다음에 어깨에 힘 풀고, 최대한 자유롭게.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재미있게, 풀어내는 글쓰기. 그렇게 해야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다나?

정치, 외교와 같은 ‘큰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 문제’, ‘일상의 문제’에 대해 소홀한 경향이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조한혜정 교수의 인류학 수업과 그가 권해준 몇 권의 책들을 통해서 그 둔감함을 조금은 고친 것 같다. (아직 예민한 단계에 이르러면 갈 길이 멀다.)

불나비

불나비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밤이면 밤마다 자유 그리워
하얀 꽃들을 수레에 싣고
앞만보고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

오늘의 이 고통 이 괴로움
한숨섞인 미소로 지워버리고
하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앞만보고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

오-자유여 오-기쁨이여
오-평등이여 오-평화여
내 마음은 곧 터져버릴것 같은 활화산이여
뛰는 맥박도 뜨거운 피도 모두 터져버릴 것 같애

친구야 가자 가자 자유 찾으러
다행이도 난 아직 젊은이라네
가시밭길 험난해도 나는 갈테야
푸른 하늘 넓은 들을 찾아갈테야

우리 과가(科歌)였단다. ‘우린 불나비’ 부분을 ‘우린 정외과’로 개사해서 불렀다고 한다. 아마 학부제 이후로 이 과가를 부르는 전통도 끊긴 것 같다. 들어보면 참 좋은 노랫말과 가락을 지닌 노래이다. 그렇다고해도 이 노래의 정서에 공감하기 힘든 우리 세대가 다시 이 노래를 부르는건 아무래도 우스웁다. ‘단절’의 극복이 꼭 ‘복고’에 있는 것은 아니니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학부제 이후,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설령 이 노래를 다시 부른다해도 당시의 선배와는 연속성을 찾기 힘들만큼…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제는 대학생활에서 ‘과 선배’의 영향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예전에는 ‘강의’ 이외의 시간은 온통 ‘과 선배, 동기, 후배’와 함께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면서 서로 왕성하게 영향을 주고 받았겠지…. 그게 꼭 긍정적인 영향만은 아니었겠지만, 덕분에 이뤄졌던 것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게 이뤄져왔던 것 중에서 ‘조직’의 상실이 가장 뼈아프다. 소위 ‘써클’ ― 또는 ‘학회’ ― 이라 불리는 조직을 통한 ‘시각 교정’ ― ‘시각 교정’이라는 표현이 풍기는 부정적인 뉘앙스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 도 없어졌다. 그 영향으로 NL세력도 씨가 말랐다. 써클에서 행해지던 한국 근현대사 세미나는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통로였다. 특수한 기능이 없이라도 ‘조직의 경험’은 정치학도에게 ‘연대의식’을 심어줬을 것이다.

이젠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긴 커녕, 자기 앞가림 하기에도 정신없이 바쁜 그런 시대가 되었다. 도대체 우리를 바쁘게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혹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마땅치 않다면,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주체성’에 대해 물음을 던질 때이다. 자기 규명, 자기 증명에 대한 고민없이 무엇을 할 수 있으리.

메마른 마음

나는 사람을 믿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어쩜 내가 믿었던 것은 ‘인류’의 선함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었지, 인간 개개인에 대한 믿음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도 비슷한 것이다. “과연 그래?”라는 물음을 받으면, “작게 보면 좌절도 있었지만 크게 보면 진보 아니었냐….”고 답하고 싶은게 내 심정이다.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러기에 겉으론 밝게 웃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가까이 여기는 사람들은 이런 나의 성격을 잘 알고, 먼자 자신의 마음을 터놓거나 억지로라도 내 속내를 들으려 노력하는 끈기를 가진 이들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굳이 말하지 않으려는데 들을 필요가 없다”는 쪽이고, 나도 그런 그들이 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남들에게 ‘굳이’ 묻지 않는다. 이게 ‘무관심’이란 것은 최근에 깨달았다.

누군가로부터 믿음을 받고 싶다면, 먼저 믿어야 한다. 믿음을 ‘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것을 버려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껏 나는 연애에서도 남을 온전히 믿는다거나, 내 모든 것을 준다거나 하진 못했던 것 같다. 최후의 만약을 남겨놓고 있었다. 모두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게 결국 지금까지의 관계가 어긋난 진짜 이유가 아닌가 싶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나의 믿음을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두렵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앞으로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며…, 내가 믿었기에 당연히 감당해야 할 상처와 대가를 모두 달갑게 여길 수 있을까? 상처와 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되뇌일 수 있을까?

지금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이라면 좋겠다.

어거스트 러쉬 (August Rush, 2007)

부실한 드라마는 참 아쉽다. 허약한 드라마를 보완해주는 음악이 있어 그나마 볼 만하다. 기타 연주와 첼로의 선율이 합치되는 장면이 좋다.

루이스(조나단 리스 마이어스 분)가 라일라(케리 러셀 분)를 만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로 날아간 장면, 시카고에서 다시 뉴욕으로 가는 장면에서는 연민과 희열을 동시에 느꼈다.

삶! 삶은 던지는 것이다. 삶은 모두가 의미없다 할지라도 자신에게 의미있는 것을 찾아 몸을 던지는 것이다. 사실 이 장면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기운을 많이 얻었다.

균형잡기

일상이 뭉개져가는 느낌이다.

언제나 좋을 수는 없다. 당연하다. 다만, 요동을 치더라도 그 진폭이 작았으면 하고 그래서 생활이 좀 안정되었으면 한다. 아니, 생활이 안정되어야 요동을 쳐도 그 낙차가 작은 것일까? 헷갈린다.

스트레스는 쌓이는데 일에는 진척이 별로 없다. 아무튼 같이 가야 한다. 일 때문에 건강, 공부를 제쳐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균형’이 중요하다.

계속 읽어야 하고, 조금씩 정리도 해가면서, 글도 써야한다. 사람도 챙기고 심고 기르고, 그러기 위해 신경써야 한다. 무엇보다 쌓인 스트레스를 덜어내기 위해 수영도 꾸준히 해야한다.

이 모든게 ‘균형잡기’ 하나에 녹아든다. 하나만 잡기 위해 손을 뻗으면 균형이 흐트러진다. 넘어진다. 모든걸 잡겠다는게 아니라 천천히 다가가는 연습을 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