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장미 (Bread And Roses, 2002)

“그들은 나를 투명인간 보듯 해요.
내가 엘리베이터 앞 바닥을 청소하고 있다면,
마치 거기에 아무도 없는 양
나를 통과해서 엘리베이터를 타러가죠.”

이 영화는 미국으로 건너온 멕시코계 불법 이민자들의 삶과 노동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마야(Maya)는 청소 용역업체인 엔젤 클리닝 컴퍼니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게 되지만, 변변한 의료보험도 보장되지 않는 열악한 고용 환경과 어머니 같이 느껴지는 동료 직원이 단 한 번의 지각으로 강제퇴사 당하는 사건을 통해 노동조합 조직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청소 용역 계약직 노동자는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나도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이들의 존재에 대해 ‘투명인간’처럼 여긴 것이 사실이다. 괜히 인사를 하고 아는 척을 하면, 피차 불편해질 것이라는 비겁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영화를 본 뒤부터는 학교 내에서, 특히 기숙사에서 청소를 위해 땀을 흘리는 ‘어머니’들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어 인사를 건내곤 한다. 피차 불편해진다고? 그건 정말로 비겁한 생각이었다. 어머니들은 나의 인사를 정말로 반갑게 맞아주신다. “아우. 학교 가는 길이에요? 공부 열심히 해요.”

에서 계약직 노동자들이 겪게 되는 문제들 대부분은 ‘효율성’에서 비롯된다.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사람들을 고용하여 청소 업무를 맡기면 비효율(이라 쓰고 ‘비용’이라 읽는다)이 급증한다는 핑계로, 그 이름도 풍자적인 ‘엔젤 클리닝 컴퍼니’에 용역 외주를 준다. 물론 입찰을 통해서 용역 업체들이 출혈 경쟁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 정도까지가 고상하게 넥타이를 매고 볼룸에 모여 파티를 하고 있던 이 빌딩 변호사들의 관심 범위이고, 그 밖의 일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무엇을 위한 ‘효율성’인가.

대학 진학이라는 꿈을 위해 함께 해오던 노동조합 조직을 포기하려는 친구를 향해 마야(Maya)는 외친다: “언젠간 대학에 갈지 몰라도, 다 잃고 나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인간에게는 ‘빵’이, 그리고 그만큼이나 ‘장미’도 필요하다.

참된 신앙

“참된 신앙은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참된 신앙은, 어느 요일엔 어떤 음식을 먹고, 어느 요일엔 교회에 가서 어떤 기도를 드리는가 함을 아는 데 있지 않다. 항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좋은 삶을 영위하며, 자기가 남에게 기대하는 것을 이웃에 베푸는 데 있다.” ― Lev Nikolaevich Tolstoi.

항상 善을 불러오는 방법

고대 로마인은 때의 혜택을 기다린다는 태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보다 그들 스스로의 역량과 판단력에 의지했다. 그 까닭은 때란 일체의 것을 다 가져오기 때문이다. 善도 데려오며 아울러 惡도 데려온다.
― Niccolo di Bernardo Machiavelli.

때란 언제나 중요한 것이지만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결국 ‘단절’을 기다린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오히려 ‘지속’의 과정에서는 緩急조절이 필요하다. 아무리 기세가 등등하더라도 혼자서 달려나가면 제풀에 지치기 마련이다. 금방 달아오른 냄비는 식는 것도 금방이다. 이러면 함께 걷는 사람들도 김샌다. 느슨함과 팽팽함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항상 善을 불러오는 방법이다.

『간디 자서전』 (마하트마 K. 간디, 동해, 2007)

박제된 위인을 지금, 여기로 끌어내려라

그동안 간디에 대한 나의 이해가 매우 피상적인 것이었음을, 그리하여 지금까지 간디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볼 기회를 스스로 포기해왔음을 고백해야겠다. 소위 ‘위인전’이라는 부류의 책들은 한 ‘인간’을 ‘위대한 인물’로 묘사하려는 사명에 벅차오른 나머지, 한 인간의 삶을 ‘과거’ 또는 ‘역사’라는 구체적 상황에 박제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위인은 자신의 비범함 때문에 평범한 독자와 유리되어 자신이 살던 시기를 쉬이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책 속의 활자活字에 갇혀 책장 속의 망자亡者가 되어버린다.

행적의 비범함이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박제로도 모자라 신의 아들이 되어버린 예수라는 사람도 있다. 예수가 신의 아들인 이상, 그가 우리와 다르다는 점은 명백하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와 같아질 수 없다.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인 예수의 삶을 다시 살려는 노력은 불경不敬이다. 어찌 한낱 인간에 불과한 존재가 신의 아들과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를 살기를 체념한 예수敎는 저 철옹성과도 같은 교회 속으로 들어앉았다. 그들은 예수의 열린 밥상을 실천하기는 커녕 우상을 섬기지 말라한 예수를 우상으로 삼고 있다. 제2의, 제3의 예수를 교회에서 찾긴 어려울 것이다. 예수를 죽인 것은 유대인이 아니라, 성경 속의 예수를 ‘지금, 여기’로 끌어내려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예수敎라 자처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위인전이나 평전 따위를 읽는 이유는 비범함이 평범함에서 비롯, 발현한다는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이다. 자신을 ‘대수롭지 않고 평범하다’하여, 백범白凡 또는 뭉우리돌이라 칭한 김구 선생의 『백범 일지』를 보라. 원주의 예수라 불린 장일순 선생은 살아생전 자신을 ‘좁쌀 한 알’에 불과하다며 일속자(一粟子)라 불렀다질 않는가? 간디가 자서전을 통해 유소년기의 부끄러운 과오를 솔직하게 고백했다고 해서, 그의 위대함에 흠결이 생기는가? 오히려 그 반대이다. 독자들은 평범함에서 비범함으로 나아가는 그의 삶을 좇으며, 죽은 간디를 다시 살려낼 것이다. 우리의 물레를 찾게 될 것이다.

『관용론』 (볼테르, 한길사, 2001)

(…) 가령 로마인들이 단지 종교를 이유로 많은 그리스도교도들의 목숨을 빼앗았다고 해보자. 그럴 경우 로마인들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우리가 그와 같은 불의를 행해야겠는가? 그들에게 박해자였다는 비난을 퍼부으면서도 우리 자신은 박해자가 되려 하는가?

양식이 전혀 없는, 혹은 아주 광신적인 사람이 있어서, 이 자리에서 내게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하자.

당신은 무엇 때문에 우리의 과오나 결점을 들춘 것이오? 우리의 기적이 거짓이고 우리의 전설이 꾸며진 것이라 해도 무엇 때문에 그것을 부숴버리려는 것이오? 그런 전설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심의 자양분이 되고 있소. 어떤 오류는 필요하기도 한 법이오. 뿌리깊은 종양이라면 그것을 잘라내려다가 전부 망칠지도 모르니 그냥 내버려두어야 하오.

이에 대한 내 대답은 다음과 같다.

진정한 기적들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놓는 당신들의 이 모든 거짓 기적들, 복음서의 진실에 덧붙여놓은 당신들의 이 모든 불합리한 전설들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라나는 신앙심의 싹을 꺾고 있소. 앎을 얻고자 하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 그러나 그러기 위한 시간이 부족했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오. 나의 신앙 교사들은 나를 속였다. 그러니 신앙에서는 진실을 찾을 수 없다. 오류에 파묻히기보다는 자연의 품속에 몸을 내맡기는 편이 낫다. 인간들의 창작물에 의지하느니 나는 차라리 자연법을 따르겠다고 말이오. 어떤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기도 하오. 그들은 거짓이 자신들을 얽매고 있음을 알게 되지만, 그들은 진실의 당연한 구속조차도 달갑지 않은 터라 무신론으로 기울게 되는 것이오. 그러므로 이들은 정신적으로 타락의 길을 걷지만 그것은 바로 다른 편이 위선적이고 잔인했기 때문이라오.

이것은 분명 갖가지 종교적 기만과 맹신이 낳는 결과들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올바른 추론을 하는 데 어느 정도의 한계를 지닌다.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논법은 썩 옳지 못한 것인데, 예를 들어 “『황금 전설』의 저자인 보라지네나 『성인들의 꽃』을 편찬한 예수회 수사 리바데네이라가 그들의 저술 속에서 이야기한 것은 모두 엉터리일 뿐이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결론을 내린다거나, “가톨릭 교도들은 많은 위그노들을 죽였고 위그노 역시 많은 가톨릭교도들을 죽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한다거나, “사람들은 신앙고백, 성찬식 같은 온갖 성사聖事를 구실로 가장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논법들이다.

나는 여기서 이와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즉 하나님은 존재하며, 이 다음 우리가 덧없는 인생을 마친 후에 우리들을 위안해주실 것이다. 그 찰나적인 생을 사는 동안 그를 너무도 잘못 이해했고, 그리하여 그의 이름으로 그토록 많은 죄악을 저지른 나머지 참혹한 기억에 짓눌려 고통받을 우리들을 말이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종교로 빚어진 전쟁들, 거의 모든 경우에 피를 흘리게 했던 마흔 번의 교회 분열을 생각할 때, 거의 언제나 참화를 초래해온 거짓들이며 서로 다른 견해들로 촉발된 풀 수 없는 증오들을 고려할 때, 그리고 그릇된 종교적 열광이 낳은 모든 불행들을 볼 때, 인간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땅에서 지옥에 빠져 있었던 셈이기 때문이다.

― 이 책, pp.122~125

프로테스탄트인 장 칼라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던 아들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모함을 당해 극형에 처하는 사건에 충격을 받은 볼테르는 이성의 빛으로 광신을 쬐어 무익하고 어리석은 종교적 불관용을 끝내고자 이 책을 썼다. 볼테르는 주로 군주, 귀족과 같은 사회의 고위층을 주된 독자로 염두에 두면서 글을 쓴 것으로 보인다.

홍세화 선생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 ‘똘레랑스’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개탄하지만, 믿음이 다르다하여 살생을 일삼던 볼테르의 시대에 비하면 오늘날은 양반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오늘의 볼테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약 이들 중에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의 말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고.

‘다름’이 ‘틀림’은 아닐지언정, ‘다름’은 확실히 불편한 것이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머리로는 “이해해야만 한다”는 당위를 되새겨도 불편한 것은 불편한 것이다. 불편한 것을 불편하지 않다고 억지로 말할 필요는 없다. 다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는 얼마나 불편할지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오늘(9월 16일) 새벽에 이랜드 홈에버 면목점을 점거하고 농성하던 노조원들이 전원 연행되었다[관련기사]. 노조의 파업에 불편을 토로하는 ‘시민’이라는 가면을 쓴 ‘작자’들은 최소한 왜 ‘그들’이 거리로 나서게 되었는지 정도는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시민’이라는 자의식을 가진 자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연대이다. 그 최소한도 하기 싫다면, ‘대한민국 민주공화국 시민’에의 정체화(identify)를 진지하게 재고해주길 부탁드린다.

친구의 출국

한 친구가 미국으로 떠났다.

본인 스스로 “나는 드센 여자.”라고 말할 정도였지만, 누구보다 여리고 순수한 心과 性을 가진 친구였기에 보내는 마음이 마냥 편치는 않았다.

가능하다면 다른 친구들과 그 친구의 뒷모습을 지켜봐주고 싶었다. 네 뒤엔 우리가 있으니 걱정말고 당차게 발을 내딛으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가족들을 뒤로하고 게이트로 들어서는 친구의 얼굴엔 아마도 멋쩍은 웃음과 시근댐이 있었으리라.

교환학생 때문에 한국에서의 소중한 인연을 다 잃으면 어떻게 하냐며 걱정하던 친구에게 꼭 해주고픈 말이 있었다. 우리가 인생이란 길을 걷기로 결심한 이상 어딘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없다. 오직 좌표상의 귀환일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길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새로운 길 위에서, 우리는 반갑게 인사할 것이고 서로에게 주름진 웃음을 지어 보일 것이고 또다시 푸지게 먹고 마셔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와 내가 할 일은 서로의 ‘지금’에 충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