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2

설 연휴 이후 처음으로 고향집에 다녀왔다.

가서는 걸려오는 전화도 잘 안 받았고, 간간히 이메일 확인만 하면서 지냈다. 푸지게 차려주시는 음식 맛있게 먹으며 지냈고 밤잠, 아침잠, 낮잠 가릴 것 없이 푹 잤다. 아버지와 함께 등산도 했고 목욕도 했다. 최근 제대한 고등학교 친구들과도 만나서 놀았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내려가서 쉬고 올라왔지만, 생각이 많이 정리되었다. 아버지께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은 것이 약이 된듯 싶다.

일단은 하고 싶은 공부 열심히 하면서 운동도 열심히 하는게 생활의 목표가 되었다.

이신행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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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수업 (체화당)

이신행 선생님은 ‘선생先生’이란 표현이 참 어울리는 분이다.

오늘 종강 모임에는 학생들 뿐만 아니라, 졸업한 선배들도 많이들 오셨다. 멀리 미국에서도 오셨고, 다들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와주셨다. 나는 내일 금강산 여행을 위해 부탁한 카메라가 때마침 도착하여,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선생님이 워낙에 허례허식 같은 것을 싫어하셔서, 성대한 파티 같은 것은 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마지막까지 선생 다우신 모습으로 계셨고, 앞으로도 그 모습 그대로 계실 것이라 믿는다. 그 한결같은 모습을 떠올리면 절로 든든해지고, 짐짓 내 몸가짐을 바로잡게 된다. 청년들보다 더 청년 같으신 선생님. 학생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소중히 여기시는 선생님. 대학에 들어와서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은 진정 큰 행복이고 행운이다.

끈덕지게 공부하기

산만한건지 피가 끓는건지 모르겠다. 끈덕지게 앉아서 공부하는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이번 학기에는 시험기간에도 아예 공부를 안했다. 그렇다고 맘놓고 논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또 불안에 떨지도 않았다. 요행을 바라는 것도 완전히 포기했다. 공부하는게 귀찮고 싫증이 나서라도 움직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몽골로 워크캠프를 갈까 싶기도 하고, 그냥 혼자서 국토대장정을 해볼까 싶기도 하다. 호주나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갈까 싶기도 하다.

왜 공부에 싫증이 났을까? 이번 학기, 정치경제 수업을 듣고 새로운 영역을 발견한 것 같은 기쁨이 있기도 했는데 말이다. 원래 나의 오랜 관심은 ‘정치경제 비판’ 쪽이었지만 말이다. 국제정치로 다시 정치사상으로 외도를 하다가 다시 돌아온 느낌이랄까.

홍기빈이 쓴 책들이랑 『권력 자본론』을 샀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의 정치경제에 대해서 좀 더 깊이있는 공부를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비교정치는 언제쯤 공부하게 될까? 이번에 선관위 논문 공모 준비하면서 선거, 정당제도 쪽으로 한 번 공부해 볼 생각이긴 하다.

IFANS 인턴십, 미루고 미루다 결국 지원했다. 상담을 했던 교수님께서는 그냥 안 하는게 좋을 것 같다시면서 추천서도 안 써주셨지만, 추천서 없이 그냥 지원서 냈다. 그것도 마감날인 오늘 오전에 ‘당일특급’으로 보냈다. 깡도 좋다. 그런데 이번부터 인턴십 모집 대상이 학부생 제외한 대학원생으로 바뀌어서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여지껏 난 언제나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지원해왔다. 그렇게 버린 종이값, 수수료값, 우편요금만 해도 꽤 될 걸? 그래도 지원 안하는 것보단 일단 지원하는 쪽이 맘 편하다. IFANS 인턴십이 되면 낮에는 서초동 가서 인턴십 하면서 논문 쓸 공부하고, 밤에는 개인 공부랑 운동을 하는 생활을 약 한 달 넘게 하게 될 것 같다. 논문 주제는 APT 협력 쪽으로 쓰고 싶은데 한반도 평화체제라는 구체적 주제도 괜찮다고 본다. 이렇게 한 달을 보내면, 결과가 어떻게 되건 좋은 방향으로 응고가 될 것 같다. 대학원 진학을 할지 말지에 대해서도 나름의 답을 얻을 수 있겠지.

지금까지의 활동 경험으로 충분하지 않나? 이젠 내 공부를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닌가? 내가 경력 쌓으려고 이것저것 과외 활동을 했던 것은 아니고, 내가 재밌고 좋아서 했던 것이니까. 충분하다 충분치 않다로 판가름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기운을 다스리기가 참 힘들다. 이 기운을 공부로 승화시키면 참 좋을텐데 싶을 정도다.

부디 이번 여름은 지금까지의 공부를 정리하는 시간으로 보낼 수 있길. 운동은 학회 운동 하나로도 족하다고 생각하자.

20년 전 오늘을 생각하며

87년 6월 9일, 오늘로부터 딱 20년 전 그 날. 백양로를 걸어 교문을 나서는 우리 선배들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새삼 궁금해진다.

다음날로 잡혀있던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에 앞서 연세인의 결의를 다지고자 모였던 교문 앞 그 자리에서, 당시 경영학과 2학년이던 故 이한열 선배는 전경이 발사한 최루탄 SY44에 뒷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바로 세브란스로 옮겨졌으나 의식불명이 되었고 사경을 헤매다 결국 7월 5일 새벽, 세브란스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故 이한열 선배와 이를 부축하는 이종창 선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늘로부터 한 달 뒤인 7월 9일, 연세대 교정에서 故 이한열 열사의 민주국민장이 있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 장례식에는 실로 엄청난 인파가 운집하였다고 한다. 연세대 교문을 출발한 영결식 행렬이 시청에 당도할 때까지 후미는 아직 교정을 빠져나오지도 못할 정도였단다. 시청으로 향하는 아현고가도로에서는 이 사람들로 인해서 고가도로가 무너지지나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라는 열악한 고용조건을 견뎌내며 이룩한 경제성장. 박종철과 이한열… 이 두 청년과 많은 열사와 거리의 시민들,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달성한 민주화. 한국 현대사는 이처럼 ‘피’와 ‘땀’으로 쓰여있으며, 아직도 그 매듭이 제대로 지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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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8일, 중앙도서관 앞 이한열 열사 추모식 ⓒ인터넷한겨레

다시 오늘… 시간도 흘렀고, 시대도 변하였다.

이제는 ‘한열이형’ 보다 ‘이한열 열사’가 더 어색하지 않은 세대가 캠퍼스를 거닐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생을 바라보는 시각도 예전과 다르고, 대학생의 자의식 역시 예전과 다르다. 더이상 ‘예비 지식인’도 아니고, 담론의 주도권은 시장에 빼앗긴 채 오히려 담론의 소비 역할만 맡고 있다.

물론 20년 전과는 물질적, 정신적 조건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는 문제이다. 반복되는 문구인 ‘열사 정신 계승’은 이러한 전환적 인식에 바탕에서 새롭게 고민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