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렷한 하루

숙제를 다 끝내고 잔다는 것이… 피곤한 나머지 몇 문제 풀다가 그냥 침대로 뛰어들었다. 야속한지고, 뛰어드는 순간 잠신이 나를 붙잡더니 아침이 될 때까지 놓아주질 않더라. 허겁지겁 세면실로 가서 그저께 사온 새 샴푸로 머리를 감았다. 쿨 멘솔향이라는데, 느낌 좋더라.

간밤에 비가 왔는지 물기 한금 머금은 캠퍼스를 걸어서 강의실로 갔다. 빈 자리는 많았지만, 맨 뒤에 둥지를 틀고 미친듯이 숙제를 시작했다. 2시간 수업이었는데 한 시간 내내 몽롱에 젖어있다가… 쉬는 시간, 주머니에 있던 단돈 250원으로 뽑아 마신 자판기 커피 덕에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 길로 다음 수업 강의실에 가서 책 좀 읽다가 엎드려서 잤다. 얼마나 잘 잤던지… 깨고 나서도 엄청 뿌듯했다. 강의실에서 이 정도 농도의 숙면을 취하다니… 깨고 나서 매점에서 김밥 사서 먹으면서 다시 읽던 책 읽었다. 또렷, 또렷…

수업도 재밌게 듣고, 오랜만에 시민사회운동 수업이 잡혀서 들어갔다. 갑자기 적응 안 되는 분위기.. 선생님께서 공력을 담아서 사자후를 뿜어내고 계셨다. 이번 학기를 끝으로 캠퍼스를 떠나시는 선생님.. 학생들을 질타하는 그 모습이 참으로 감사했다. 덕분에 또 한 번, 또렷… 또렷…

친구 재익과 청경관에서 간단히 배를 채우고 신촌저널 일감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기숙사로 돌아오던 길… 키 큰 나무들이 양 쪽으로 늘어서서 푸르름을 숨쉬던 조용하던 그 길 위에서, 또 한 번 또렷…

대학 4학년

대학 4학년…

이 시절을 지나 온 사람들은 당시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을까? 내 또래 친구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취업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기업 공개채용 일정에 맞춰서 영어 점수 및 면접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겠지?

어떤 때는 취업이라는 선택이 참으로 속 편한 길이기도 하겠구나 싶다. 일단 취업이라는 정해진 길이 어렴풋이나마 있으므로.. 뭐, 취업 이후의 고달픔이야 논외로 한다면 말이다.

나는 취업을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일단 취업을 하면 무슨 일을 하게 되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 일을 내가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이 시기를 마지막으로 잠정적으로나마 배움을 접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걱정이 되는 일이다.

사실 배움을 지속한다해도 배움 자체의 행복 이상, 내가 어떤 생산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논문을 쓸 역량이 내게 있는가? 아니면, 대학원 진학해서 차츰 생각해봐도 늦지 않은가? 단순히 시간을 벌려고 대학원엘 가겠다는 것은 아닌가?

내 마음은 취업 보다야 대학원 진학이 ‘나’에게 좀 더 맞는 것 같다는 쪽으로 기울어있는데, 취업해서 일을 배우는 것도 (보람만 있다면야) 크게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번 여름에는 인턴에 지원해보려고 한다. 기업체 말고 연구원 쪽으로…

방금 이 글을 적다가 한 선배의 싸이월드에 들어가서 다이어리를 읽었다. 하루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일기. 힘든 나날과 그 속에서의 번민이 잘 드러난 일기. 그 일기들을 읽고 나니 지금의 내가 참으로 안일한 자세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헤쳐나가야 할 세상이고, 내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가중치를 두면서, 즐겁게 배우고 일하고 사람 만나며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생각은 그렇게 한다. 그런데,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행복해지길 두려워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산다고 정말 행복해질까 먼저 걱정부터 되는 것이다.

이제는 다짐이 아닌 실천이 필요하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균형 잡으며 살아야 겠다.

Never doubt…

Bartlet : Never doubt that a small group of thoughtful and committed citizens can change the world. You know why? (사려깊고 헌신적인 시민들 소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 왜인줄 아나?)

Bailey : It’s the only thing that ever has. (그들만이 세상을 바꿔왔기 때문입니다.)

― <West Wing>, Season 4, Episode 15.

숭고함

숭고한 장소는 일상생활이 보통 가혹하게 가르치는 교훈을 웅장한 용어로 되풀이한다. 우주는 우리보다 강하다는 것, 우리는 연약하고, 한시적이고, 우리 의지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 자신보다 더 큰 필연성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것.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p.231

리더의 자질

‘누구나 리더가 될수는 있지만 아무나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가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리더가 있기 마련이었고, 공동체가 겪는 문제의 원인을 리더에서 찾고자 하는 시도는 인류 공동체 문명의 역사와 함께 했다 해도 과한 말은 아닐 것이다.

정치학은 예전에는 제왕학으로 ‘좋은 리더란 무엇’이고, ‘어떻게 좋은 리더를 만들어 낼 것인가’의 문제와 함께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政體)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었다. 플라톤의 『국가』를 봐도 그러하다. 『국가』는 인간의 ‘좋은 삶’을 보장하는 정치체제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임에 동의하고, 대체 ‘무엇이 좋음인가’에 대한 토론의 결과물이다.

현대 사회에서 리더십 담론은 더욱 활발히 제기되고 있다. 이 담론의 내용은 주로 ‘사회가 어떻게 좋은 리더를 길러낼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해야 좋은 리더가 될 수 있는가’에 맞춰져 있고 이 형식은 ‘자기계발서’라는 ‘신종 자발적 내적 순응 기제’로 나타난다.

나는 이 글에서 ‘리더가 꼭 갖춰야 할 자질’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나는 대개 아래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 리더가 되고, 이런 자질을 잘 갖춘 사람이 좋은 리더가 된다고 생각한다. 아래의 자질을 갖지 않아도 리더가 될 수는 있고, 때로는 좋은 리더라 불리울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 것 같다.

리더가 반드시 갖춰야 할 자질 중 하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다. 이는 그룹 내 구성원의 마음, 그룹 내 구성원 중의 소수 그룹의 마음, 그룹 외 다수 대중의 마음 모두에 해당된다. 사실, 리더십 담론에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 이외의 것들은 그저 리더의 개별성이 빚어낸 다양한 리더십의 제 모습일 뿐이다.

예를 들어 ‘섬기는 리더십’과 ‘군림하는 리더십’, 이 둘 중에 규범적으로 무엇이 더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두 리더십을 발휘하는 리더의 개별성에 그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물론 앞서말한 두 리더십이 ‘좋은 리더십’ 즉, 과정과 결과가 모두 좋은 리더십일 경우라는 것을 전제해야 하겠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과 이를 이해하는 ‘포용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공감력’이 있어야 한다. 공감력이란 곧 다른 사람의 입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감수성을 말한다.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선 이 ‘미루어 짐작함’이 단순한 짐작을 넘어서 어느 정도의 정확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바탕에서 자신의 독특한 인간론을 펼친 사람이 바로 마키아벨리이다. 그는 『군주론』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본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사실 보다 자신의 재산을 빼앗긴 것에 더욱 분노하기 마련”이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피통치자의 재산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가슴 깊은 원한을 살 일은 없을 것”이라 당부한다.

나는 다른 능력들보다 ‘공감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어찌보면 인간학의 최고 단계가 아닐까 싶다. 공감력은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인간들과의 상호 작용 경험을 통해서 배양된다. 이 공감력은 자연히 ‘의사소통능력’과 맞닿아 있다. 신호를 분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신호를 언제나 합리적으로 이해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 한 인간이 공감력을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더 열리어, 많은 사람을 직접 겪어봐야만 한다. 이런 담금질의 과정에서 지치지 않으려면 공동체와 인간에 대한 강한 애정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리더의 자질을 거론하며 리더의 필수 덕목처럼 얘기되는 ‘비전’을 얘기하지 않은 것은 의아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비전은 2차적인 문제이다. 매력적인 비전을 제시하여 이에 대한 그룹 내 구성원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지만, 결국 이 비전을 구체적인 기획과 실행으로 옮겨내는 과정에서야말로 리더십이 빛을 발휘하는 것이다. 또 비전은 늘 상황에 따라 쇄신되는 유동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비전 그 자체보다는 비전을 합의하는 능력 또는 비전을 구성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

훌륭한 리더, 좋은 리더는 공동체를 이롭게 한다.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을 이롭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과 함께 일하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 성취에 사로잡힌 리더와 함께 일하게 된다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고 오히려 책임 회피에 급급한 리더와 함께 일하게 된다면, 진정성이 없는 칭찬을 남발하며 칭찬을 해야 할 상황에서는 오히려 회피하는 리더와 함께 일하게 된다면, 그 일의 결과야 어떨지 모르는 일(일의 결과란 때때로 신의 장난이 결정짓는 경우가 있으므로,)이지만 함께 일하면서 행복감을 느끼긴 힘들 것이다. (작성: 2006. 11. 11. / 수정 2007. 5. 9.)

다문화사회로 가는 한국 : 제16회 연세 지역학 학술회 참가기

아직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담론이 여물기 위해서는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분명히 이것은 ‘시간’ 문제이다. 오늘날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인종의 비율은 약 3% 정도로 1960년대 후반의 유럽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가속화 되고 있는 지구화의 흐름과 점차 국경이 희미해져가는 추세에서 한국이 예외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다문화주의가 제기된 과정: ‘동등한 대우’에서 ‘차이의 인정’으로

김남국 교수는 유럽에서 다문화주의가 제기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째, 사회적 소수의 숫자가 일정수준 이상이 되면 사회적 소수는 다수와 동등한 사회경제적 대우를 요구하게 된다. 둘째, 경제적 인정을 넘어선 문화적 생존을 주장하게 된다. 다문화사회의 갈등이 본격화 되는 것은 두번째 단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한 사회의 지배적 문화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문화 차이를 공공영역에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첫째 단계는 보편적인 인권 차원에서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다른 인종, 다른 민족, 다른 국적, 다른 문화적 배경의 인간이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인정은 근대 국가에서는 그렇게 어려운 수준이 아니다. 근대 국가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구성원 간의 무차별성과 동질성에 기반한 국민 의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이가 존재한다면 제도적으로 이 차이를 경감시켜야 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에서 사회적 소수가 요구하는 문화적 생존권이 쉽게 인정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문화적 생존권의 인정이 기존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불편함은 공공영역에서 다문화적 생존 권리를 지원해주는데서 오는 매우 구체적인 것이다.

사회적 소수: 소수 인종과 소수 민족

사회적 소수도 소수 인종ethnic minority과 소수 민족national minority으로 나눌 수 있다. 소수 인종은 자발적 선택에 의해 이민을 택한 사람들로 사회경제적 인정은 원하지만, 정치적인 분리나 자치를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반면, 소수 민족은 역사 속에서 다수 민족 사회에 병합, 정복 당한 경우로 소수 인종에 비해 보다 전투적으로 자치나 문화 보존의 권리를 주장한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소수 인종은 다문화사회인 미국 내의 한인 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소수 민족은 영국의 경우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등이 될 것이다.

유럽의 대응: 관용, 비차별의 법제화, 다문화주의

이러한 다문화의 도전에 직면해 유럽의 대응은 크게 세 단계의 변화양상을 가진다고 한다. 첫째가 관용이고, 둘째가 비차별의 법제화, 셋째가 다문화주의이다. 관용은 매우 필수적인 덕목이지만, 다수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점에서 언제나 자의적으로 멈출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비차별의 법제화는 다수가 소수를 차별하는 표현, 접근 방해, 물리적 폭력 등을 가중 처벌하는 것이다. 다문화주의는 정책적으로 문화적 권리를 지원하는 단계이다.

한국은 위의 세 단계 중에서 아직 관용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지만, 이주노동자 문제나 베트남 결혼이주자 문제는 더이상 한국 사회가 높은 동질성을 고집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현상이다. 사회적 양극화 해소와 절대빈곤층 해결은 여전히 시급한 사회경제적 현안이긴 하지만, ‘다문화주의의 대두는 한국 사회의 존엄과 민주주의를 시험하는 사례’가 될 것이다.

프랑스의 공화주의와 영국의 심의다문화주의: ‘원칙’과 ‘합의’라는 두 방법

김남국 교수는 프랑스의 공화주의와 영국의 심의다문화주의라는 두 나라의 고유한 원칙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사회에의 적용 가능성 여부를 명확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프랑스의 공화주의는 홍세화 씨가 늘상 강조하는 그 똘레랑스를 바탕으로 기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비차별의 제도화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영국의 심의다문화주의는 관용은 물론 비차별의 제도화와 문화적 권리를 행사하는데까지 나아가 있다. 프랑스의 공화주의는 분명한 원칙으로 논리적 명쾌함을 보여주지만, 문화적 생존권 보장이 미약하다. 영국의 심의다문화주의는 공공영역에서의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방식이지만 자의적인 판단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다수제 민주주의와 합의제 민주주의: ‘지루한 일상’이 될 정치

한국 사회의 원칙은 다수제 민주주의majoritarian democracy라 할 수 있다. 다수결은 민주적 의사결정의 기본이다. 그러나 다수결이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소수 의견의 존중과 소수의 권리 보호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는 곧 ‘사회적 연대감’이 사회에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다수결에서 소수가 구조적 소수로서 반복되는 게임에서 계속 소수가 된다면 단순 다수제simple majoritary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합의제 민주주의consensual democracy의 대표적 형태인 협의제 민주주의consociational democracy네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 내 다양한 하부 집단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둘째, 이렇게 인정된 집단의 대표들이 대연정을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것, 셋째 이 대연정의 구성원칙으로 비례성을 존중하는 것, 넷째가 각각의 집단이 상호거부권을 갖는 것이다.

김남국 교수는 ‘한국 사회가 다수제 민주주의에서 합의제 민주주의로 이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각 집단이 상호거부권을 가지게 되면 정치가 항상 정체되어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김남국 교수는 ‘유럽의 경험에 비춰보았을 때, 각 집단에 상호거부권이 주어지더라도 학습효과를 통해 거부권을 행사하기 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정국을 운영해나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다문화사회에서는 한 사회에 지배적인 거대담론이 존재할 수 없으며, 정치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의 합의’를 도출해내는 지루한 과정이 될 것이라고 한다.

정리: 한국 사회의 다문화와 심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공론장

앞서 얘기했듯, 현재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갈등을 걱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로 생각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다문화에 대한 대응이 주는 교훈은 단순히 사회적 소수의 문화적 생존권 인정이 하나의 사회 규범이 된다는 것에 있지 않다. 다문화적 요구에 대한 대응이 주는 교훈은 다문화사회에서 갈등을 조정하는 기본적인 원칙이 ‘대화와 타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원칙이 깨어지고, 분열된 사회의 갈등이 그대로 거리에서 표면화된다면 사회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소수 민족에 의한 갈등보다 소수 인종에 의한 갈등이 예상되므로, 극단적인 사회 불안은 예외적인 상황이라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이들의 2세 그리고 베트남 결혼이주자와 이들의 2세의 비율이 계속 늘어나고 있고 탈북 이주민의 수도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다문화 정책이 마련될 필요는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단순 다수제에 의한 정치 게임은 이러한 소수 구성원들을 배제시키고 최소한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동등하게 부여하는 정도에서 끝날 염려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단 한 사람의 정치적 의견이라도 존중하며, 가능한 많은 사람의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합의제 민주주의는 유의미한 이행으로 보인다.

갈등은 예상보다 더욱 심각할 지도 모른다. 어떤 소수자 집단의 지배적 문화가 소수자 집단 내부의 소수 문화를 억압하는 경우(이를테면, 특정 종교의 여성 차별)도 있을 수 있고, 소수자 집단의 대표가 해당 소수자 집단을 충실히 대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소수 집단의 문화적 권리가 기존 사회의 지배적 문화적 가치와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해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 방법은 대화와 타협 뿐인 것이다. 그대화와 타결이라는 원칙의 반복 게임을 통해 대화 관습habit of dialogue을 학습해야 한다.

이런 협의제 민주주의, 심의다문화주의의에서 대화 관습을 학습하고, 대화와 타협의 원칙을 배양하는 시민교육의 장소로서 강조되는 것이 바로 공론장이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공론장은 생활세계와 정치를 연결해주는 중간 역(域)이다. 이제 실천적 물음이 제기된다. 한국 사회에서 공론장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또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