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레식 특강 수강기

지난 목요일인 5월 25일, 로렌스 레식 교수의 강연회에 다녀왔다. 광화문 영상미디어센터(광화문 일민미술관 5층)에서 진행되었고 예상외로 좁고 더운 곳이었다. 강연 시작 시각인 2시가 넘어가자, 50여석 남짓되는 자리는 다 차버리고 추가로 의자를 놓는 부산한 모습이 레식 교수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강연은 영어로, 그리고 간결하고 설득력 있는 프리젠테이션으로 진행되었는데 후시 통역이라 그런지 집중력이 떨어졌다. 나는 강연이 끝날 무렵과 QnA 시간에는 도저히 흐름을 쫓아갈 수 없었다. 한-미 FTA에 관심을 갖고 갔으나, 강연 내용이나 QnA 과정에서 그 맥락이 별달리 강조되지 않았던 것도 이유가 되긴 할 것이다.

나는 CC에 대해서만 조금 알고 있었지 그의 저서인 『코드』나 『자유 문화』를 읽어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무관심에 이은 무식을 해소하는데  꽤나 도움이 되었다.

혁신의 환경(innovation environment)을 자유로움(free)와 통제됨(controlled)의 두 축으로 나타낸다면 19세기는 통제됨에 가깝고 20세기는 자유로움에 가깝다. 그런데, 21세기는 오히려 19세기 보다 심한 극단적인 통제의 분위기로 흐르고 있다. 이러한 환경은 자연히 혁신을 저해하는 환경이며 ‘좋지 않다’.

이에 레식은 모든 저작물에 자동적으로 저작권을 부여하는 것을 멈추고, 저작권 보호가 필요할 때 따로 요청하는 방식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한다. 또한 이 저작권은 짧은 주기로 기한 연장을 통해서만 그 권리가 인정되도록 만들자고 주장한다. 사후에 더 이상의 인센티브가 없는 저작권을 70년동안 ‘씩’이나 인정하는 것은 비경제적이기 때문이다. (레식이 주장하는 저작권법 개정에 관해서는 그의 저서 『자유 문화』 뒷 부분에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고 한다.)

사적 재산권은 매우 소중하다. 지적 재산권도 사적 재산권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므로 보호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 레식이 경계하는 것은 ‘지적재산 극단주의’다. 이것은 거래 비용을 높일 뿐만 아니라, 문화 창작 또는 혁신에 있어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저해한다. 이것은 다시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마치, 무료로 공개된 날씨 정보가 유료로 공개되었을 때보다 더 큰 경제적 효용을 창출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저런 얘기들이 강연장을 채우는 동안 나는 “만약 인센티브가 없으면 누가 ‘저작’을 하려고 할까?”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글을 적으면서, ‘무엇을 만들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 본연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자면, 나는 이 블로그에 강연회 후기를 적고 있다. 이것은 경제적 활동이라기 보다는 개인적 창작 활동이다. 이 글이 타인에게 효용(utility)이나 영감(inspiration)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블로그라는 툴이 가진 접근성과 연결성 덕분으로 매우 감사할 일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당장에, 그리고 본래적으로 저작권 보호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 내가 이 글을 통해 상업적 이익, 저작적 이익을 얻길 원한다면 따로 저작권 보호 요청을 하면 되는 것이다.

『일하지 않는 사람들 일할 수 없는 사람들』 (후타가미 노우키, 홍익출판사, 2005)

시대가 낳은 세대에 대한 책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할 수 없는 것이다”, 니트족에 대한 후타가미의 결론이다.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신조어인 니트족 역시 ‘사회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문제적 개인이 아닌 시대의 산물로서의 니트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후 일본의 풍요를 만들어냈던 부모 세대와 그 풍요 속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얘기를 듣고 자란 자식 세대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욕에 기반하여 비롯 ‘하고 싶지 않은 일’이더라도, 끊임없이 직업 전선에서 싸우다 정년퇴임을 하던 것이 부모 세대였다면, 자식 세대는 비록 보수가 적더라도 ‘하고 싶은 일’ 그리고 가능하면 그 일 속에서 ‘노동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자식 세대는 물욕에 사로잡힌 부모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며, 부모 세대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히거나 융통성 없는 성실함이 체득된 모범생 니트족이 되기 쉽다.

고도 성장하며 고용을 늘려가던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의 일본 경제는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인하여 정규직 보다는 파트타임 일자리가 더욱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모범적인 가정 속에서 부모와의 비교를 통한 자기 비하와 ‘부모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식의 자립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며 자란 자식은 학교에서나 직장에서의 사소한 실수에도 좌절감을 느끼며 방 안에 쳐박혀있게 되는 것이다.

저자인 후타가미 역시 니트족이었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일본의 NPO법인인 뉴 스타트 운동 사무국에서 니트족에게 다시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사회 속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돕는 기숙사 운영이나 직업 훈련 등을 제공하고 있다. 니트족에 대한 그의 대응에 특이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는 니트족의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또한 니트족의 ‘느림’에 대한 특기는 고령화 된 사회에서 행해지는 노인 복지 활동에 좋은 장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본다.

작년인가, 한국에서도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던 때가 있었다. 그 이후에 한국 사회의 대응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후타가미의 지적 처럼, 문제적 개인으로 비춰지는 현상들은 대개 여러 사회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들이 많다. 다시 이들의 삶을 인정하고, 개인의 태도에서부터, 가정에서부터 문제를 풀어가려는 노력을 한다면 또한 이러한 인력을 다시 경제적 순환 구조 속으로 편입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니트족은 문제적 개인이라기 보다는, 문제적 사회에 대한 전위적 경고이기 때문이다.

변화를 긍정하기

만물유전(萬物流轉).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경험을 통해 재확인된 관념은 쉽사리 인식을 놓아주지 않는다. ‘행복하다’고 느끼면서도, 이제 ‘행복하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 시간이 흐르는 것. 타오르는 한여름과 같은 젊음을 잃는 것. 사랑하고 있는 서로의 마음이 변하는 것. 변화는 언제나 두려움을 안고 진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긍정해야 한다. 변화한다고해서, 변화했다고해서 지나쳐 온 행복한 나날들이 변색되는 것은 아니므로. 여전히 그것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