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부모님과의 대화는 언제나 부끄러운 것이 된다. 그래도 솔직히 말씀드렸다. “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는 그 질문에, “우선 제 몸과 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그런 공부를 해보고 싶습니다”하고 솔직히 말씀드렸다. 의외로 후속 질문이 없었던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내 속은 후련했다.

페일 세이프 (Fail Safe, 2000)

핵은 지구상에서 딱 세 번 그 위용을 드러냈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그리고 1986년 체르노빌에서 말이다. 미증유의 대폭발과 방사성 물질의 유출은 핵무기 보유 사실로 국제 사회의 영향력이 인정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냉전기 미·소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을 때, 경쟁적인 핵무기 증강은 압도적 핵 우위를 가지기 위한 노력이었고, 이 노력이 무산되자 핵은 상호확증파괴(MAD) 전략과 핵 확산을 막기 위한 국제 레짐인 NPT를 유산으로 남겨놓았다.

핵 전쟁이 일어난 뒤, 세계의 모습은 어떠할까. 이 세계를 묘사하는 간결한 문장이 있어 소개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 하는 세상(The Live envy The Dead)”이 바로 그것이다.

냉전이 한참이던 1960년대, 작전체계의 오류로 핵을 싣은 美 폭격기가 대서양을 건너 모스크바로 향하게 된다면? 그 폭격기가 만약의 실수에 대비하여 만들어 놓은 안전장치(fail-safe)로도 제어할 수 없는 경계선을 넘어갔다면?

이 물음의 가장 비극적 결말이 영화에 담겨져 있다. 강대국 간 군비경쟁이 초래한 그 서늘한 결말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레오스트라우스』

2005년 봄 학기 박성우 선생님의 서양고대정치사상 수업을 통해서 레오스트라우스의 플라톤 독법을, 장동진 선생님의 정치이론입문 수업을 통해서 레오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을 접했다.

플라톤의 『국가』는 주인공 소크라테스가 ‘哲人(최선자)의 통치’를 통해 최선의 통치체(kallipolis)를 만들 수 있으며, 이 국가(혹은 정체)에서 사는 사람들의 영혼을 더욱 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설득하는 논변이 주된 내용이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며, 민주적 정치체제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상당히 위험할 법한 내용이라고 오해할 만하다.

그러나 레오스트라우스는 ‘플라톤, 크세노폰과 같은 현인들의 글을 멍청한 일반 대중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현인들은 소수의 훈련받은 엘리트들만이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밀교적(esoteric) 저술방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밀교적 저술방법을 사용하게 된 것은 ‘철학자들이 알아낸 진리’가 일반 대중들에게는 ‘알아서는 안 되는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자들은 겉으로는 사회 유지를 위한 도덕과 윤리를 지키라고 종용하지만, 여러가지 밀교적 방법으로 진짜 진리를 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과 정치는 본래 대립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산파술을 통해 폴리스의 시민들에게 진리를 알리려다 잡혀서 죽음을 당했으며, 이를 본 그의 제자 플라톤은 철학자가 폴리스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밀교적 저술방법이다. 반면에 니체는 이러한 밀교적 전통을 깨뜨리고 극도의 자유와 허무주의를 전파한 위험한 철학자이다.

스트라우시언들의 목적은 ‘좋은 레짐을 만드는 것’이다. 좋은 레짐에서 좋은 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트라우스는 정작 현실 정치와는 무관한 학자였으나, 앨버트 윌스테터 교수의 도움으로 스트라우스의 제자들은 현실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알란 블룸이나 어빙 크리스톨과 윌리엄 크리스톨, 폴 울포위츠 등이다. 이 스트라우스 학파의 계보는 책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저자인 박성래는 기자인 자신이 정치철학에 대해서 책을 쓰는 것이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자신은 기자이므로 일반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집필을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이 책을 통해 현대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이해의 기초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은 스트라우시언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한 예로, 미국이 ‘악의 축’으로 북한을 지목한 것이나, ‘참주정의 종식’ 등의 수사를 쓰는 것은 역시 스트라우시언의 사상들이 미국 외교정책에 녹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트라우시언과 조지 W. 부시는 상호적이다. 저자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로 파악한다. 여러가지 물증을 통해 스트라우시언이 현재 미국의 외교정책에 사상적 기반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적과 동지의 구분이 필요한 것은 외부의 적이 있음을 통해 내부의 단결, 즉 손쉽게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는 ‘애국법’과도 같은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적은 소련에서 불특정 테러단체로 바뀌었다. 테러와의 전쟁은 끝이 없다. 그래서 9·11은 스트라우시언들에게는 호기였다.

레오스트라우스가 미국 네오콘들의 사상적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자유주의는 인간을 타락시킨다. 미국인들이 그토록 사랑해마지 않는 자유, 소위 리버럴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10대 소녀가 스트립 댄스를 추고 있는데, (소위 리버럴이라는 자들은) 이 소녀가 최저임금은 받고 일하고 있는지를 궁금해 한다.”

또 하나, 스트라우시언들의 국제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은 투키디데스적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제국주의가 어떻게 멸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결국 ‘강한 자의 힘이 곧 정의’라고 하는 트라시마코스의 정의관이 국제정치에서는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아테네인과 멜로스인의 대화는 매우 대표적이다.

아테네인은 멜로스인에게 “아테네가 제국이 되어서 다른 도시국가를 정복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며, 만약 멜로스가 아테네와 같은 힘을 가졌다면 역시 마찬가지의 행동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며 잔인한 최후를 선물한다. 결국 아테네는 무리한 시칠리아 원정을 통해 멸망하게 되지만, 현대 미국은 고대 아테네 보다 더욱 월등한 힘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에 과도한 팽창이 멸망의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저자는 최근 자주 언급되고 있는 레짐(regime)과 북한에 대한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 ‘정권교체’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고 함)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트라우스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한다. 또한 현재 부시 2기의 대외 정책의 교과서가 되고 있다는 나탄 샤란스키의 『민주주의를 말한다(The Case for Democracy)』 역시 북미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이해하기 쉽게 썼다고 하지만, 지나치게 반복되는 말들은 책을 두껍게 하는 데만 공헌을 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또한 학술서가 아니기 때문에 레오스트라우스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을 미뤄놓고 칼 포퍼의 ‘사이비 과학론’만을 반복하고 있다. 다만 앞으로의 남북미 관계를 바라보는데 여러모로 유의미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저평가 되기는 아쉬운 책이다.

누구처럼 ‘시리즈로’ 까지 꿈을 꾸는 것은 아니지만, 꽤나 다양한 유형에 다양한 사람으로 이뤄진 꿈을 꾼다.

한 친구의 말에 의하면, 사람은 언제나 꿈을 꾸지만 꿈을 꾼 내용 자체를 기억하지 못 할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꿈을 꾸지 않고 잠을 잤다고 생각되어질 때도, 누워서 무슨 꿈을 꿨더라 곰곰이 생각해보면 간밤의 꿈 내용이 기억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다만 무슨 꿈이건 신나게 한 번 꾸고 나서 깨면, 매우 어리둥절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침대에 누워 눈을 말똥하게 뜨고, 왜 그런 꿈을 꿨는지 혹은 그 내용은 무엇인지 기록해보려고 노력한다.

왜 사람들은 명확히 기억되기도 어려운 이 현상을 두고 ‘꿈’이라고 하는 걸까. 또 왜 미래의 자신의 희망사항에 대해서 ‘꿈’이라고 하는 걸까. 그러고보면 언어 안에서도 묘한 긴장감이 형성되는 것 같기도 하다.

갈망하던 꿈을 이룬 상태, 그 상태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과연 영원할 수 있을지… 자고 나면 모두 잊혀져버리는 한낱 꿈과 같진 않을지….

왕의 남자 (2005)

장안 저잣거리의 화제라면 화제인, <왕의 남자>. 하지만 그 뚜껑을 열어봤을 때, ‘과연 그만한 주목을 받을만 했던가’ 싶기도 하더라. 그저, 잘 만든 사극 정도. 본디 관객의 눈이라는 것은 편협하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것이니, 평소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던 주제를 다룬 영화는 저평가를 줄 수 밖에 없다.

다만 ‘결핍된 인간’의 대표적인 유형인 연산이 나와,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으로 칼부림을 하는 광기는 봐줄만 했다. 공길을 자신의 침소에 들게 하여, 그림자 인형을 하는 대목이 그러했다. 녹수가 연산을 얼르는 장면 역시 관객으로 하여금 연산의 광기를 납득시키기 위한 장면이었다.

장생의 경우에는 겁대가리를 결핍했었는데, 그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다시 태어나도 광대로 태어나겠다는 장생, 그는 “광대는 그저 신나게 놀고 배불리 먹으면 그만”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왕의 처소 앞에서 줄타기를 하며 시중 왕을 ‘웬 잡놈’이라 칭하는 견유(犬儒)다.

나의 시선은 줄곧 연산과 장생에 맞춰졌기 때문에 이준기의 공길은 평가보류다. 실제로 극 중에서도 그다지 비중있는 배역으로 보이지 않았다. 연산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수단, 다시 말해 녹수를 대신할 인물 정도로 여겨졌다. 신인인데다, 감우성이나 정진영에 둘러싸여서 연기하던 이준기의 공길은 ‘발성 결핍’이었다.

감독의 의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의 남색(男色)에 대한 묘사는 이제는 누구나 다 아는 상식과도 같은 것이었으므로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오히려 <왕의 남자>와 같은 도발적인 타이틀은 오히려 영화의 본질을 흐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연산이 공길에게 하는 기습 키스는 그야말로 뺏어도 무방할 장면 베스트로 꼽힐만 하다.

원한다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연산과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장생, 先王의 善政에 대한 열등감과 모성애 결핍을 통해 광기의 비극을 보였던 연산과 왕, 신하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가지고 놀 수 있는 희극의 대명사 장생, 이 둘의 대비가 가져오는 비극과 희극의 교차는 눈이 먼 장생의 마지막 줄타기를 보고 연산이 온 몸으로 웃는 대목에서 극적으로 표현된다.

마당극은 매우 시원했다. 당대의 사람들은 저잣거리에서 제대로 노는 그들을 보며 아주 시원하게 웃을 수 있었으리라. 헌데, 왜 오늘날의 광대들은 우리를 시원하게 웃겨주지 못하는 걸까. 뭐 그런 씁쓸한 생각이 들더라.

지금, 만나러 갑니다 (いま、会いにゆきます, 2004)

어떤 영화라도 ‘그런 장면’이 하나 쯤은 있는 것 같다. 영화 내의 전개 흐름에서도 매우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고 보는 입장에서도 ‘아, 여기가 감동 포인트구만…’ 싶은 장면 말이다. 아마 대부분의 신파영화의 성공 여부는 이런 부분을 얼마나 매끄럽게, 자연스럽게 만들어 내느냐에 있을 것이다. 이른바, ‘억지 눈물’을 이끌어낸다는 악평을 받지 않도록 말이다.

굳이 신파가 아니더라도 영화에는 이런 장면들이 한 둘은 있을 것인데 브레송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결정적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그런 장면’은 그 순간만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듯 보이니까 말이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내가 본 2005년 개봉작 중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한 영화였다. 이 영화에서의 ‘결정적 순간’이라 하면, 병상에서 일어난 미오(다케우치 유코 분)가 타쿠미(나카무리 시도 분)을 만나러 가는 장면일 것 같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함께 울려퍼지던 BGM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다.

사실 ‘삶을 담은 영화’라고 하기엔, 판타지 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되어 있긴 하지만 그 역시 삶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된다. 우연히(?) 다녀온 자신의 미래를 보고, 현재의 어긋남을 바로 잡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짧은 삶을 예견함에도, 다시금 그 삶을 선택한다는 ‘용단’은 그 사랑의 크기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