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가르기

“너는 어느 편이냐?”

방문이 벌컥 열리고 불현듯 전짓불의 공포(이청준, 1971)가 엄습한다. 과연 전짓불 너머에는 누가 서 있을지 잘 살펴야 한다. 전쟁 중에서는 내전이 가장 참혹하다고 한다(투키디데스). 중재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충 그까이꺼 식의 타협은 없다. 내전은 불신을 만들어내며 싹에 이어 뿌리까지 잘라내게 만든다.

나는 분리주의를 혐오한다. 나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다. 나는 이데올로기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한국은 마치 이념을 대립각으로 좌로, 우로 나뉘어 싸우는 양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형식적으로만 그렇다. 형식논리로 나는 좌파요, 우파요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나. 그런 식이라면 어느 쪽도 지지할 수 없다.

현대 민주사회에서 다원주의는 포괄적 교리의 하나다. 이 사회에서 공존하기 위해서 관용은 필수 덕목이다. 만약 내가 무브먼트를 좋아한다고 해서 MP올스타의 팬들을 인정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념적 층위까지 올라가면 얘기는 조금 달라질 필요가 있다.

이념적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나의 궁핍, 패배, 나의 피착취, 소멸 등을 전제, 필요조건으로 생존할 수 있는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을까. 어불성설이다. 쥴리엣을 사랑했던 로미오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애시당초 나를 착취함으로써만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과 사랑할 수 있냐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자신의 소멸을 긍정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가 정치적 지평을 가지는 것 또는 가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권리 위에 잠자며 정치 따위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욕할 자격도 없다. 나는 때로 분열된 자아를 가진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한다. 이문열, 김현 등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기도 하며 민주노동당에 비판적 지지를 보내기도 한다. 분열된 사회에서 스포와닝 된 나는 필연적으로 자아분열을 피할 수 없는 겐가.

반드시 어느 쪽이기를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러한 이분법적 대립구도는 맑스의 논리에 의하면 당연하다. 맑스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도덕적 우위를 ‘계급적, 구조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를 비판한답시고 이타적인 자본가와 이기적인 노동자의 예를 드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좌/우나 진보/수구, 이념적 구분과도 같은 형식적 편가르기를 뛰어넘어서 이런 사고실험을 한 번 해보자. 그러니까 이념적으로 대립을 하는 사람들 말고 그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이념과 이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의 흐른다. 강 한 편에는 ‘다 같이 잘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또 다른 한 편에는 ‘혼자서만 (넓어야 가족, 친지 정도) 잘 살면 그게 잘사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서있다. 이 둘이 화해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아싸리 이것은 도덕적 가치관의 차이다.

글쓴이

Sehee Park

Advocate for Innovators. Law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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