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

자기 자신을 긍정함에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자신감이나 상황에 대처하는 긍정적인 태도가 나온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원래 그래’하며 자신의 잠재력을 구획짓고 그 틀에서 자기합리화라는 만병통치약을 처방받는 사람보다야, (차라리) 자기 사랑이 지나친 사람에 더 애정이 간다.

자기 잘난 맛에 남을 깔본다면야, 재수는 좀 없기로서니 매력은 있는 것이다. 겸손이야말로 미덕이겠지만, 그럴 겨를이 없을 바에야 자기를 사랑하기라도 하라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도 무엇도 사랑할 수 없고, 누구로부터도 무엇으로부터도 사랑받을 수 없다.

『넘치는 사랑』 (덴도 아라타, 2002)

텐도 아리타는 소소한 일상과 함께 정신적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를 쓰고 있다. 그의 간결하고 섬세한 문체는 소재와 더불어 가슴 속에 자잘한 진폭의 여운을 남긴다. 책의 제목은 내용을 아주 잘, 혹은 반어적으로 수사한다.

책은 사랑의 과잉과 결핍(이것부터가 사랑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겠지만)이 주는 심리적 공황, 불안을 묘사하고 있다. 아내와 아이를 사랑하며 가정을 이끌어가는 성실한 가장, 서툴지만 좋은 아내와 엄마가 되려 노력하는 부인, 왜 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상처를 안기게 되는 것일까. 강박에 시달리는 아내를, 왜 남편은 감싸줄 수 없었던 걸까.

네 개의 단편 모두 마음에 들었지만 가장 공감했던 것은 「평온의 향기」였다. 「우선은, 사랑」에서 결국 드러나게 되는 갈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며 나름의 답을 준 단편이었기 때문이다.

「평온의 향기」에는 두 명의 남녀가 사회복귀를 위해 동거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외부의 시선으로는 정상(正常)에서 멀리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두 사람이지만, 외출할 때면 세 번 이상 가스와 문단속을 해야하는 여자를 그냥 기다려줄 줄 아는 남자와 자신 없어 하는 남자를 말없이 부둥켜 앉고 도닥여주는 여자, 둘은 서로가 서로를 채워주는 존재이다. 각자 한 사람으로는 제 몫을 해내지 못한다는 비난과 자괴의 벽에 갇혀 살아왔지지만, 둘은 동거 과정을 통해 서로의 빈 곳을 채워나간다.

그렇게 서로를 채울 수 있는 두 사람이야말로 그들을 불필요하다 여기는 다른 가족들보다 더 온전한 인간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편 가르기

“너는 어느 편이냐?”

방문이 벌컥 열리고 불현듯 전짓불의 공포(이청준, 1971)가 엄습한다. 과연 전짓불 너머에는 누가 서 있을지 잘 살펴야 한다. 전쟁 중에서는 내전이 가장 참혹하다고 한다(투키디데스). 중재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충 그까이꺼 식의 타협은 없다. 내전은 불신을 만들어내며 싹에 이어 뿌리까지 잘라내게 만든다.

나는 분리주의를 혐오한다. 나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다. 나는 이데올로기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한국은 마치 이념을 대립각으로 좌로, 우로 나뉘어 싸우는 양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형식적으로만 그렇다. 형식논리로 나는 좌파요, 우파요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나. 그런 식이라면 어느 쪽도 지지할 수 없다.

현대 민주사회에서 다원주의는 포괄적 교리의 하나다. 이 사회에서 공존하기 위해서 관용은 필수 덕목이다. 만약 내가 무브먼트를 좋아한다고 해서 MP올스타의 팬들을 인정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념적 층위까지 올라가면 얘기는 조금 달라질 필요가 있다.

이념적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나의 궁핍, 패배, 나의 피착취, 소멸 등을 전제, 필요조건으로 생존할 수 있는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을까. 어불성설이다. 쥴리엣을 사랑했던 로미오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애시당초 나를 착취함으로써만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과 사랑할 수 있냐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자신의 소멸을 긍정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가 정치적 지평을 가지는 것 또는 가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권리 위에 잠자며 정치 따위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욕할 자격도 없다. 나는 때로 분열된 자아를 가진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한다. 이문열, 김현 등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기도 하며 민주노동당에 비판적 지지를 보내기도 한다. 분열된 사회에서 스포와닝 된 나는 필연적으로 자아분열을 피할 수 없는 겐가.

반드시 어느 쪽이기를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러한 이분법적 대립구도는 맑스의 논리에 의하면 당연하다. 맑스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도덕적 우위를 ‘계급적, 구조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를 비판한답시고 이타적인 자본가와 이기적인 노동자의 예를 드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좌/우나 진보/수구, 이념적 구분과도 같은 형식적 편가르기를 뛰어넘어서 이런 사고실험을 한 번 해보자. 그러니까 이념적으로 대립을 하는 사람들 말고 그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이념과 이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의 흐른다. 강 한 편에는 ‘다 같이 잘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또 다른 한 편에는 ‘혼자서만 (넓어야 가족, 친지 정도) 잘 살면 그게 잘사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서있다. 이 둘이 화해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아싸리 이것은 도덕적 가치관의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