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금자씨 (2005)

복수 3부작의 완결, 박찬욱 영화 미학의 절정, 이영애의 연기 변신. 온갖 수식어가 달라붙어 있지만, 내게는 <올드보이>와 마찬가지로 불편한 영화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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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감하는 첫 장면부터, 교도소 생활로의 플래쉬백은 화려하다. 사실 그러한 화려함이 없었더라면 아예 스크린에 눈을 붙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절대적으로 미를 추구하는 장면 하나 하나에서 시작되어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난감한 시츄에이션의 연속. 이것이 첫번째 불편함의 원인이다.

간통한 남편과 상대 여자를 살해한 후 직접 시식하셨다는 ‘原마녀’가 간통죄로 들어온 죄수에게 욕탕에서 구강 성행위를 시키는 장면이나 뉴스를 보며 아침식사를 하던 백선생(최민식 분)이 박이정(이승신 분)을 식탁에 엎드리게 한 후 성교를 하고 나서 다시 자리에 앉아 버젓이 수저를 드는 장면은 맥락상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무래도 웃어야 할 것 같은데, 장면 자체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두번째 불편함은 시원시원하던 시퀀스가 갑자기 막혀버리는 순간, 그러니까 금자(이영애 분)가 백선생의 핸드폰 고리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마치 개같이 초라한 백선생을 살려줄 것 같던 분위기에서 돌연 반전이 시작된다. 이 반전은 금자의 복수를 지켜보던 관객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폐교에 모아놓고 시작하는 백선생 처리 비상 대책 위원회의 회의는 우스꽝스럽다. 백선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누가 먼저 처리할 것인지, 이 중에서 밀고자가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

이 영화를 같이 본 친구는 말했다. “내가 그 부모의 입장이 아니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유괴범이 내 앞에 잡혀있다해도 그렇게 할 자신은 없어.” 나는, “그래도…. 내 자식이라면….” 하며 끝을 흐렸지만, 나 역시 비닐옷에 흉기를 들고 백선생에게 복수할 차례를 기다리는 가족들을 보고 강한 거부감을 느끼긴 했다. ‘자식이 저렇게 당하는 장면을 눈으로 본다면, 복수심이 불타오르긴 하겠지…. 그래도 그렇지 저건 좀….’ 정도의 타협이었다.

결국 이 불편함은 관객의 입장에서 복수에 대한 판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13년간 복수만을 위해 살아온 금자에게 복수는 그녀의 전부였지만, 그녀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그녀가 유괴의 공범이 되었던 원모 어린이에게 사죄하는 것이었다. 나레이션도 말한다. ‘제니에게만 원모가 보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금자가 얼마나 서운했을까’. 친절해 보이겠다는 빨간 눈화장을 지우고 담배를 무는 순간 나타난 원모의 환영(幻影)은 미안하다고 말하려는 금자의 입을 막아버린다. 백선생에 대한 복수를 끝낸 순간에도 금자의 영혼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죽어버린 원모에게 무엇이 사죄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가족들이 사적 보복을 선택하고 계좌번호를 남긴 뒤 나루세를 후다닥 떠났듯, 복수는 허망한 것이다. 금자가 백선생에게 했던 복수는 결국 금자의 딸을 인질로 금자를 ‘죄짓게’했다는 개인적인 앙심이었지,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서 백선생 당신 같은 인간은 없어져’가 아니었다. 원모의 환영(幻影)은 백선생에 대한 복수가 끝난 후 무언가를 말하려는 금자에게 ‘엿이나 먹으라지’ 정도의 반응이 아니었을까.

세번째 불편함은 바로 이금자라는 인물이다. 교도소 내에서 친절한 금자씨라 불리던 금자는 출소하고서 찾아간 이들에게서 ‘변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열아홉의 발랄한 금자, 입소 직후 펑펑 울던 금자, 새침하게 웃으면서 ‘마녀’를 골로 보내버리던 행동, 신앙 간증에서의 모습, 너나 잘하라는 금자, 힐은 없어라고 묻던 금자, 원모 부모를 찾아가선 대뜸 손가락을 자르던 금자, 초 두개를 꽂아놓고 꺼뜨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금자, 제니를 찾아 호주로 가서 발랄하게 웃고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 금자. 이런 다층적인 금자를 ‘친절하다’는 수사 하나로 묶을 수 있을까. 대체 금자의 진심은 무엇인가? 어디까지가 금자의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위선일까.

한 번 보면 누구나 다시 보게 된다는 금자의 천사 같은 외모는 오히려 관객이나 금자의 주변 인물이 금자를 왜곡해서 보게 만든다. 뻔뻔스럽게 강남의 영어학원에서 유아들을 가르치는 백선생의 이중적인 모습이나, 금자가 잡혔을 당시 언론들의 황색 저널리즘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뭐든지 이뻐야 된다”는 금자의 대사가 오래토록 남는 것 같다.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2006)

진정성에 귀 기울이기

고3 여름. 닭 백숙이 되기 위해서 찜통 속에 들어앉은 닭이 생각날 정도로 덥고 습했던 그 여름의 한가운데, 나(그리고 우리)는 매일 같이 학교에 나와 몸에 잘 맞지도 않은 책상을 끼곤 손 때가 묻은 문제집을 펼쳤다.

그나마 여름에는 낮보다 밤이 덜 졸립고 선선해서 공부하기 편했던 기억이 있다. 교실에 있는 TV에서는 EBS 수능특강이 방영되고 있었고 지루한 문제풀이 간간히 넣어주는 휴식 시간에 나온 한 아나운서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추천해줬다.

초등학생, 중학생 권장도서 따위를 믿지는 않지만 한 번 읽어서 그 감흥을 느낄 수 없다면 시간의 간격을 두고 다시 들춰보는 것도 책읽기의 요령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것을 재단하려는 시도 자체가 좀 위험하긴 하지만, 한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니까.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이 책을 집어들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대가리에 잉크를 뒤집어쓴 채 종이를 씹으면서 얼마나 더 있겠다는 것인가? 왜 나와 함께 가지 않나? 저 멀리 코카서스에, 위험에 처한 수천만 동포가 있는데? 함께 가서 구해주자…….”

그러다, 자신의 계획이 한심하게 여겨졌는지 웃으면서 덧붙였다.

“……구해주지 말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지. 하지만 자네는 이렇게 설교하지 않았는가,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라고……. 그럼 구해야지. 자네는 설교에만 소질이 있는 건가. 왜 나랑 같이 가지 않는 건가?”

(…)

“안녕Au revoir, 이 책벌레야!”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자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다는 게 창피한 노릇인 줄은 그 친구도 알고 있었다.

평생 책으로만 세계를 이해하고 또 구원하려고 노력했던 ‘나’가 친구를 떠나보낸 항구에서 ‘조르바’를 만나 크레타 섬으로 간다. 그렇게 시작되는 조르바와의 동거는 ‘나’의 삶을 통째로 뒤흔든다. ‘나’는 조르바를 경외하며, 그에게서 느껴지는 인간 본연(本然)의 열정이나 거침없는 욕망에 감탄한다. ‘나’가 책을 통해서 끊임없이 세계를 탐구하려고 노력했던 반면, 조르바는 오랜 세월이 가르쳐준 경험의 진리를 체득한 사람이다.

그 어떤 끈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를 추구하는 조르바를 보며, ‘나’는 흡사 이 인간(조르바)를 자신의 사유 속에서만 존재하던 붓다와 오버랩 시킨다. 모든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며, 자신의 몰락이 곧 세계의 몰락이라 말하는 조르바. 신 조차 엿 먹이는 그의 자유분방함과 경계가 없는 열린 마음은 우리 모두가 자신의 진정성(authenticity)에 좀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8마일 (8 Mile, 2002)

에미넴에 의한 에미넴에 대한 영화이지만, 이 영화는 추상적인 ‘삶’에 대한 메타포를 담아내고 있다. 임신한 옛 여자친구에게 차를 줘버리고 와선 엄마의 트레일러에서 살고, 월세 미납으로 그 트레일러에서 마저 쫓겨나야 하는 신세의 주인공―그러니까 한 마디로 ‘시궁창’에서 살고 있는 그는 자신의 랩 실력 하나 만을 믿고 원대한 꿈을 꾼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 랩 배틀에서 상대의 랩을 듣고 있던 에미넴의 표정이다. 꾹 다문 입과 위로 치켜떠서 고정된 눈. 그러다 자신의 turn이 왔을 때, 그야말로 one shot one opportunity(Lose yourself 中)를 잡아채어 상대를 눌러버린다. 랩 배틀이 끝나고, 야근을 하기 위해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는 에미넴의 뒷모습을 남기고 크레딧이 올라간다.

두어시간만 자신의 자리를 봐달라며 동료에게 부탁한 것을 잊지 않고 반장과의 야근 약속도 잊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 랩 배틀에서의 승리감에 젖어 해방을 만끽할 것만 같던 예상보다 너무나 차분하지 않았던가. 이 마지막 결말이 <8 mile>을 ‘이름난 랩퍼가 출연한 볼만한 영화’에서 ‘묘한 여운이 남는 영화’로 수준을 끌어올렸다.

“야근은 왜 해? 돈 쓸 데 있어?”

― “녹음실 사용로 내야지….”

“빙고에서 돈 땄어, 너 음반 레코딩은 하게 됐어?”

― “아니, …내가 (직접) 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