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혁명

요근래 식사를 거르거나, 하더라도 인스턴트로 때우거나 했다.

그랬더니 (정신이 신체를 지배해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뭘 먹어도 그게 힘이 되질 않고 그냥 단순히 배가 부르다는 느낌만 생기는 것이었다.

아니 그나마도 먹었다는 느낌이 채 가시기도 전에 푹 꺼지는 허탈감은 도대체 뭐람.

하루 30분 운동과 끼니 거르지 않기.

아주 사소할지 모르나 이것이야 말로 나에게는 ‘생활의 혁명’이다. 이것에서부터 시작하자.

드러내기 욕구

지나친 드러내기 욕구는
소통에의 노력 따위의 허울좋은 핑계보다는
오히려 애정결핍과 자기과시의 적나라한 여과없는 반영이라,
도저히 스스로에게 구역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선을 뽑고, 덮어뒀던 책을 들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야 한다.
좀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 오늘,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정리하며

왜 대륙마다 문명의 발전 속도가 달랐을까?, 『총, 균, 쇠』

저자의 주된 물음은 이것이다. ‘왜 각 대륙에서 문명의 발전 속도가 달랐을까?’ 이 물음을 구체화하면 ‘왜 잉카 제국의 황제인 아타우알파가 스페인 군대의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사로잡혀야만 했을까?’

추측할 수 있겠지만, 이 물음은 제1세계와 제3세계의 부와 힘의 불균형, 북반구와 남반구의 불균형이라는 사실이 촉발한 것이다. 이런 물음에 가장 손쉬운 대답은 ‘각 민족마다 유전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만, 저자는 그러한 가정을 완강히 부정하고 유럽중심주의나 인종차별주의를 공격한다.

저자는 말한다. 바로 환경의 차이일 뿐이었다고, 빙하기가 끝난 이후 우연적으로 형성된 지구의 모습이 그 차이의 궁극적인 원인일 뿐이라고. 주된 주장은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뽑아낼 수 있지만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료들은 실로 방대하며 흥미롭다. 특히 이 궁극적인 원인으로 말미암아 유라시아 대륙, 그 중에서도 유럽이 아메리카 정복의 직접적 요인인 무기, 병원균, 문자, 중앙 정치 조직 등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전개는 시원하다.

말미에는 인간과 문화의 역할을 언급하면서 이 두 가지 요소가 역사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자칫 결정론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책의 내용을 보완한다. 다만 답답한 것이 있다면 저자는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마땅히 독자가 가질 법한 물음에 앞질러 대답해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자판기 커피

건조기에 빨래를 넣고 나서 커피를 한 잔 뽑아 들었다. 월요일까지 독서 보고서 두 편을 써야한다. 부끄럽지만 아직 책 한 권을 다 읽지 못했다. (정확히는) 어제 아침, 점심을 먹지 않고 세미나에 통역 선발 심사에 진을 다 빼서 무척이나 졸립지만 기어코 다 읽고 말겠다는 각오다. 취침 시간을 뒤로 미루고 싶거나 어떻게든 말짱한 정신상태를 유지하고 싶을 때, 커피를 마시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고작 이백오십원의 카페라떼 한 잔이 나를 각성시킨다. 앞으로 최소한 두 세시간은 벌었다. 내게 주어진 이 짧은 시간 안에 약 사백오십페이지를 읽고 내일 하루 종일 열 바닥의 보고서를 쓸테다.

믿음 1

당장이라도 지구가 멸망할 것 같은 우울한 날씨라도 우리는 언젠가 화창한 날씨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별조차 잠들어버린 깊은 밤에 다시 내일의 태양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 믿음.

선택의 무게

누구도 내게 지우지 않았지만 스스로 어깨에 놓은 짐 때문에 미친듯이 괴롭고 슬플 때가 많다.

김명섭 교수님께서 시간에 종종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한다. 히틀러고 스탈린이고 부쉬고 누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 했던 것’이라고. 물론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코웃음을 치고도 남을 말이나, 그네들이 실제로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섬찟하다.

아이데알리스트들의 위험함이 이런 것이다. 만들어진 (만들어놓은) 이상 혹은 이상 세계의 틀을 (마치 여러 모양의 틀로 빵을 찍어대듯) 현실에 덮어 씌우려는데서 생기는 무리함과 성급함 그리고 폭력….

자신이 엘리트라 최면을 거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업을 듣고 생활을 하니 마치 내가 엘리트 인양 착각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김명섭 교수님의 말씀대로) 혹 나의 선택의 무게가 나를 압도할 때가 올 것 같아서 두렵다.

나눔의 집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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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진다는 만고의 진리를 몸소 체득하고부터, 슬슬 감퇴해가는 자신의 기억력에 대한 신뢰를 줄여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사진으로든 글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어떻게든 증언을 많이 하고 학생들을 많이 만나서, 할머니들이 죽더라도 앞으로 이 문제가 많은 대학생을 비롯한 학생들에게 인식되어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게 하려는 할머니들의 노력과 맞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2005년 5월 14일, 나눔의 집을 방문하였고 2005년 5월 15일에 서울로 돌아왔으며 할머니와의 대화와 조별 토론, 청소 자원봉사, 역사 박물관 견학 등의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모두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고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자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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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일본군’위안부’할머니 문제를 접하면서, 들었던 막막함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15년 동안 많은 법률가와 활동가들이 힘을 합쳐서 노력해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이 문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와 같은 부분 말입니다. 더불어 개인적인 죄책감이나 자책감도 있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일을 우리가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크게 보면, 수요집회 참석이나 나눔의 집 방문도 큰 흐름에서는 문제 해결에 일조한 것이지만 15년 동안이나 해왔던 일을 단순히 그대로 20년 동안 이어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일본군’위안부’할머니 문제를 다양하게 접근하고 또 정의해서 운동의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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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별 토론 시간에 제가 거듭 강조하며 말했지만, ‘위안부’할머니 문제는 민족 문제, 여성 문제이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전쟁 문제입니다. ‘인류 광기의 결집’이라는 전쟁은 그 과정에서 많은 폭력을 낳게 되는데, 역사가 말해주듯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늘 ‘여성’이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위안부’할머니 문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갖고 있다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전개로) ‘이라크 파병’에도 반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국익 파병론’을 내세워, ”아 그래도 나라를 위해서 파병해야지”하는 여론이 (2003년 당시)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런 사람들도 ‘위안부’할머니 문제에는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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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러한 현상은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할머니 문제를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정말 빠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이런 공감대를 이용해서, ‘반일 감정’을 부추겨서 어떻게든 성과를 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위안부’할머니 문제는 해결된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토론시간에도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이런 국가적인 구분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국제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것은 이 문제가 ‘여성 문제’로 묶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세기를 정리하는 시기의 한국에서 여성 운동이 성장하면서 ‘위안부’할머니 문제가 함께 이슈가 되었던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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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드는 생각이 ”대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입니다. 말씀을 해주셨던 할머니들은 우리에게 ”공부 열심히 해서 더 힘센 나라 만들라”고 주문하셨지만, (저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기업에 취업을 하고, 국가 기관의 요직에 자리잡는다 하여도 이 문제는 그리 쉬이 해결될 것 같진 않습니다. 물론 거시적으로 국민 절대 다수가 이 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 되어서 public agenda가 된다면 또 모르지만 이 문제가 제도권으로 진입하여도 늘 난항을 겪는 이유가 단순히 이 문제가 ‘외교적 문제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마치 고대 교수나 다른 학생들이 자신들의 연구비 지원줄, 밥줄이 될 삼성에게 소리높여 비난하지 못하듯) 이 문제의 해결을 그닥 ‘탐탁치 않게 보는’ 그런 세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결 이데올로기 따위를 강요하여 할머니들을 ‘속’하게 폄하하고, 개인의 자발적인 동원(자발적 동원이라는 것 자체가 형용모순인데)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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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서 내린 결론은, 절대로 ‘위안부’할머니 문제를 이 문제로만 따로 봐서 해결책을 세우고 대책을 세워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중에서 누가 이 운동 전선에 그야말로 투신하여 해결을 위해 앞장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문제가 다양한 사회적 관계와 맥락에 위치한다는 것을 잘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가 민족 수탈, 여성 인권 유린 뿐만 아니라 전쟁 범죄, 국가 폭력이라는 것도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혹 언젠가 우리의 이름으로 자행될 수 있는 이와 같은 문제가 다시금 지구상에서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는 전쟁에 반대하고 또 파병에 반대해야 합니다. 이런 연결은 절대로 정치적으로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지원하고 자원봉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이 문제의 해결을 원한다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맞게 될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어떠한 정치적 판단을 내릴 것인지 궁구해야 할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둔감한 자신을 깨우고, 좀 더 예민해지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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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들었던 진중권의 강연(강연 후기는 제 미니홈피 게시판에 있어요)을 듣고 요즘 늘 그 얘기만 하고 그 생각만 하고 다니는데, 이 운동을 좀 더 빨리 우리의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역설적으로) 할머니가 말씀하셨듯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론의 리더가 될 수 있는 ‘기술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관성이 되어버리고 정기적인 자극에 둔감해져버린 대중을 일깨울(무슨 계몽주의 사상가 같지만, 그런건 아니고) 그런 새로운 담론을 생성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게을리 말고, 언제나 민감한 후각을 유지하면서 움직일 때는 발빠르게 움직이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비장

念과 生을 함께 하겠다는 뜻을 품었을 때.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게 되었다. 단순히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고지식한 사람, 깐깐한 사람 정도로 치부하게 된 순간, 아니 그것보다 자신에게 갖다 댄 엄격한 잣대에 상당히 어긋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순간.

내가 ‘비장하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가 올까. 비장한 결의, 비장한 삶. 비장하다는 표현은 이런 단어들이랑 잘 어울린다. 비장한 김장, 비장한 소비, 이런 것들은 우스운 것이다.

왜 우리는 생각하는대로 살지 못할까.

그저 나는 내 자신이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이나 목표, 자세, 가치, 마음가짐 따위를 바꾸지 않기를 원한다. 충분한 숙고를 통해 세운 내 가치에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자신감과 두둑한 배짱이 필요하다. 뭐,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조금 더 이성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나치게 자책하지만 않는다면 자가 평가는 꽤나 중요한 과정인 것 같긴 하다.

읽기 2

읽기 1

여러가지 목적으로, 여러가지 읽는 방법이 있겠다.

나는 필요에 의해서 읽는 것이 책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도 생각했었다. 아니 그보다 우선 나는 책을 읽어도 읽는 것 이상으로 읽어내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에 꽤 많은 한탄과 자괴를 했던 것 같다. 왜 있잖는가. 영화를 봐도 그저 아무 할 말이 없다던가. 책을 읽고서도 그래, 그래서 뭘 어쨌다는 건가 싶은 생각. 별 볼 일 없던 영화거나 정수리를 꽂는 충격을 주지 못하는 쓰레기 같은 책이거나…였을까?

아니 그것보다 내 사고가 체계적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체계적이지 못한 사고 능력은 아무리 읽어도 읽어도 그야말로 정보들을 systematic하게 구성할 능력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에라― 아예 그럴 필요 없이 그냥 닥치는 대로 읽다가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챙기자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번뜩이는 아이디어 조차 구체화, 체계화 시키지 못하는 사고 능력으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래서 요즘은 읽는 것이 두렵고, 또 두렵고, 또 두렵다. 읽어도 읽히지 않는 것 같고 자꾸 조급함만 느끼니. 방법은 스스로를 별로 대단치 않게 여기고 묵묵히 여러 번 읽는 것 밖에 없을 것 같은데 벌써부터 겉멋만 들어서 나도 한소리 해보겠소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상당히 찝찝하다. 나는 정말 보잘 것 없는 놈이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못참겠다 꾀꼬리

나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를 가지고 나를 불쾌한 인간 취급하는 것에는 도저히 관대할 수 없다. 나도 마음이 편치 못하다. 대체 왜 내가 그 수많은 오해들과 불식을 감당해야 하지? 어떻게 보면 이유는 딴 데 있는데, 찾기 쉬운 핑계거리로 나를 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알다시피 나는 그렇게 착한 인간도 이타적인 인간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큰 죄를 지었다고 인정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희생양이 되고픈 마음도 없다. 내가 무슨 당신 우울증이나 풀어주는 특효약이냐고, 참 나. 아름다운 오월 둘쨋날 아침의 문자는 휴대폰을 던져버리기에 충분했다,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