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사

끈이 되는만큼 책을 묶고 잡동사니들을 박스에 넣어 포장하고 그렇게 새벽 네시까지 깨어있었다. 10시에 일어나서 싸놓은 짐만 우선 학생회관 편집실로 옮기기로 했다. 차로 기숙사에서 학생회관 앞으로 이동한 뒤 간신히 1층 로비로 옮겨놓고, 샌드위치와 자판기 커피를 마쉬며 숨 좀 돌리고 있다.

신영복 선생이 貧者의 계절은 여름이라지만 이 좁은 감방에서는 차라리 겨울이 낫다고 했던가? 이유는 여름의 열기 속에서는 옆에 누운 한 사람이 단순한 열을 내는 덩어리로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충 이러한 이유 때문에 차라리 옆에 있는 사람을 끌어 안을 수 있는 겨울이 낫다 했다.

이사가 싫은 것은 몸이 고단하기 때문 만이 아니라 항상 곁에 두고 아껴야 할 책들이 단순한 짐 이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책 한 묶음 한 묶음을 옮기면서 한 숨을 쉬곤 하는데, 그렇다고 책 사기를 하지 않을 것은 또 아니니. 읽고 팔고 순환주기를 빨리하면 이런 걱정이 없어지려나?

다섯 번째 이사

고향집에서 서문 하숙집으로의 이사.
하숙집에서 홍대 근처 친구 자취방으로의 이사.
자취방에서 별장 원룸으로. 별장에서 기숙사로.
이제 기숙사에서 다시 고향집으로.

짐꾸리기만 이번이 다섯번째. 적지 않은 양의 짐이다. 책은 더 늘어났고 옷가지들은 겨울 옷이라 더 두꺼워졌다. 신발도 하나 더 늘었고 뭐 그렇다. 일단 책은 노끈으로 묶어서 편집실에 옮겨놓을 생각이고 옷가지나 자질구레한 것들은 모조리 고향집으로 보낼 작정이다. 내 핏 속에 유목의 지류는 없는지 이사 시기만 되면 괜히 스트레스를 받는다. 완연한 정착은 언제나 이뤄질런지….

아버지의 e-메일

짧으면 이틀, 길면 일주일 간격으로 아버지에게서 메일이 온다. 항상 ‘사랑하는 아들아’로 시작해서 ‘건강한 아들이 되어라’로 끝나는 메일의 내용은 늘 긍정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격려의 말도 잊지 않는다. ‘멀리 서울에서 공부하느라 힘들겠지만 인내하라’는 투의.

답장은 잘 쓰지 않는다. 쓸 말도 없고 ‘추운데 열심히 공부하느라 힘들지’라는 내용에 솔직히 답하려니 간지럽기도 하고 실망을 안겨드리자니 가슴 아프기도 하고.

난 어머니나 아버지를 생각하며 무언가를 해왔다. 나를 위해서라는 생각은 큰 힘을 얻지 못했고 지속력을 가지지 못했다. 장학금으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자. 좋은 성적으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자. 뭐 이런 생각 뿐이었다. 왜 스스로를 위해서 살지 않는가를 묻는다면 나는 부모님 역시 스스로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있다고 대답하겠다. 내리사랑은 원래 그런 것인가.

내 힘으로 부모의 굴레를 벗어나기 전까지, 나는 그런 동기로 살 수 밖에 없다. 부모의 말이라면 꿈뻑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 생각이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를 읽고 난 후의 잡상

순수한 현대인이 오직 현대의 조건에 구애되어 사고하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개인에 대해 아쉬운 감정은 갖고 있지만 도덕적으로 비난할 생각은 없다. 기본적으로 나는 인간이 구조(가족, 역사, 전통 등)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주장에 동의하며, 누군가 인간을 ‘조건의 동물’이라 표현한 것에 동의한다.

나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공부는 오직 역사(歷史)라고 확신한다. 내가 ‘현대인은 역사 공부를 게을리 하고 있다’고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국무총리 인준 과정에서 병역비리네 투기재산입네 뻔뻔하게 캐묻는 국회의원들이 있기도 하고 나는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노력이라도 했으니 ‘덮어놓고 비난’은 피해주었으면 한다.

자본주의(資本主義)가 현재의 조건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하나의 사실fact이다. 그럼 이 자본주의는 인류의 역사와 처음부터 함께했는가? 물론, 아니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길어야 삼사백년 짧으면 백오십년에 불과하다. 이 책은 이 자본주의가 어떻게 현재의 조건이 되어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주된 목적인 책이다. 거칠게나마 유물론적 역사관에 동의한다면, 산업자본주의 생산관계가 현 상부구조를 완전히 결정짓는 것은 아닐지라도 많은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주장에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거대한 실험장인 소비에트가 붕괴하고, 맑스에 의해 암 선고를 받았던 자본주의는 오히려 전 세계를 무대로 활개치고 있다. 오직 자본주의의 제 1목표라 할 수 있는 이윤 동기가 국경은 물론 인간마저 무시하며 자본의 집중을 가속하고 있다. 이윤 앞에서는 모든 것이 용서된다. 에서 앙리 베르두가 연이은 살인에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그가 사회의 기본원리, 바로 자본주의의 핵심을 정확히 이해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며 그것은 사실이었다.

자본주의가 변종에 변종을 거듭하며 전 세계에서 맹위를 떨치자, 이에 섣불리 항복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호들갑을 떨며 ‘역사의 종말’을 말하기도 했고, 『현대 사회학』으로 저명한 앤서니 기든스는 『제 3의 길』에서 ‘자본주의 다음의 대안’은 없다고 섣불리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난 오히려 그보다 훨씬 전인 1920대에 ‘마지막 혁명’은 ‘마지막 수(數)’와 마찬가지로 말이 안 된다며 오직 영원한 혁명만이 있을 뿐이라던 자미아친(Zamyatin)의 혜안이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