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책벌레, 2000)

이 책은 세계가, 엄밀히는 유럽이 중세 봉건제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자본주의 시대로 이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1936년에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이었다는 리오 휴버먼Leo Huberman이 썼고 무엇보다 쉽고 재미있다는 큰 장점을 바탕으로 전 세계적으로 읽혔다. 책은 총 2부(“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자본주의에서 어디로?”)로 구성되어있고, 35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이 정도 분량만으로도 자본주의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막연히 그리고 있던 중세 봉건제로부터 자본주의로의 이행과정을 저자가 이 책의 두 가지 목적이라 밝힌 ‘경제 이론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것’과 ‘역사로 경제 이론을 설명하는 것’으로 좀 더 선명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특히 당대 인물의 입을 빌려 시대상을 설명하는 부분이나 신문기사 등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 시대를 규정짓는 몇 가지 단어나 수사 같은 것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과연 어떤 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정보화시대, 문화산업시대, 세계화시대 등, 이 시대를 설명하는 단어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유물론적 사관의 시각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시대가 아직 ‘자본주의’ 시대라는 사실이다. 중세 봉건제의 낡은 관습을 부르주아지가 타파함으로써 올리게 된 자본주의 시대의 장막은 아직도 내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가 이뤄지면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하게 될 것이라던 마르크스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마르크스의 예언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에 어떠한 수정을 가할 필요도 없이, 체제 내적 모순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파멸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 그 과정에서 해야 할 일은 노동자들이 계급적 자각을 할 수 있도록 선동하는 것뿐일까. 부르주아 계급이 혁명에 성공했던 것은 이미 물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을 혁명은 이 물적 토대를 폭력적으로 빼앗는 방법이 되어야만 할 것인가. 혁명의 시대에 부르주아지들이 자유방임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듯 자본주의 다음의 시대가 오기 위해서는 물적 토대의 재구성과 새로운 문화적 힘이 필요할 것이다.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2004)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12월 9일 생일, 친구들로부터 이 책을 선물 받았다. 생일 선물로 ‘인간 실격’이라니. 표지는 에곤 쉴레Egon Schiele의 「자화상」인데, 서문을 읽으면서 줄곧 이 그림이 떠올랐다.


1인칭 시점의 소설을 읽으면 나는 종종 작가와 화자를 동일시 하곤 한다. ‘자전적 소설’이 아닌 경우에도 말이다. 더군다나 이 작품처럼 배경이나 인물 설정이 전혀 허구적이지 않을 때는 그냥 이 책의 주인공이 다자이 오사무라고 머릿 속에서는 계속 생각하며 소설을 읽는 것이다. 이런 독법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어쨌든 이 책은 그렇게 읽었음을 밝힌다.

책날개에 따르면 이 소설을 쓴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는 다섯 번째의 자살 기도에서 사망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 자체를 괴로워하는 자에게는 자살이야말로 구원의 수단인 것일까. 아니면 자살조차도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지병이 있던 요조는 결국 병원으로 옮겨지는데 이 병원이 정신병원임을 알고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된다. 주윗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광인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에도, 이에 더해 요조가 보기에도 내가 보기에도 그다지 정상적이지 않은 ‘인간’들이 요조를 비정상으로 규정해버린 것에 대해서도, 이 모두가 요조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위궤양으로 죽고, 시골에서 요양하게 된 요조. 하루는 식모가 잘못 사온 헤노모틴을 먹고 설사를 하게 된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p.134)

이 책의 독자는 누구나 정작 ‘인간 실격’인 자들은 넙치나 호리키 따위가 아닌가 싶을 것이다. 요조의 사진과 수기를 건네주면서 한 남자에게 마담은 말한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p.138)

온갖 익살로 남의 눈을 속이며 ‘나는 인간 세상에 잘 적응해서 살고 있고 앞으로도 잘 적응해서 살 것’이라고 말하는 요조는 나의 모습과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호리키와 ‘비극명사’, ‘희극명사’ 맞추기 놀이, 반의어 찾기 놀이 등을 하면서 ‘죄(罪)’의 반의어를 찾으려 고심하던 요조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생각한다. 요조는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자학적 반성’은 ‘자기 파괴’와 맞닿아있는 것일까.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2003)

사람들이 워낙 재밌다 재밌다 해서 도리어 읽기를 미뤄왔던 책이다. 무슨 반발심인지…. 아직 내가 , 등의 공전의 히트 영화를 보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 책도 8con의 집에서 빌리지 않았으면 영영 찾아읽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행여 누군가가 dvd로 소장하고 있다면 빌려서 보게 될 것이니 애써 찾아 볼 필요는 없다.

간단히 말해, 책은 사서 읽어도 나쁘지 않을 만큼 후회 없는 작품이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다른 무엇보다 ‘재미있다’는 것이다. 책이 재미있다는데 또 그 밖의 것을 말해 무엇하랴. 그렇지만 그러기에는 또 뭔가 섭섭함이 남는 책이었다.

야구는 재미있는 운동이다. 길죽한 배트에 날아오는 공을 맞추는데 손맛이 있고 진루나 주루플레이에서의 그 짜릿함이 있고 대타의 홈런이나 수비 실수가 주는 의외성까지…. 직접 해도 재미있고 보는 것도 재미있는 것이 야구라는 운동이다. 한국 프로야구가 시작되기 전만 해도 고교야구는 인기가 있었고, 일본만화만 봐도 스포츠 청춘 연애물이 자주 그리듯 ‘甲子園(고시엔)’은 언제나 많은 화제를 낳는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에서 형들이랑 하던 야구가 그렇게 재미있던 기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재미’에 있어 ‘프로’가 필요조건은 아닌 듯 싶다.

프로라는 프랜차이즈에 대항하기 위해 ‘삼미 슈퍼스타즈’가 자기수양의 야구를 했다는, 어찌보면 황당한 이 상상력 덕분에 인생에 대해, 시간에 대해 신선한 시각을 접할 수 있었다. 과연 ‘마지막 팬클럽’이 했던 야구가 정말 재밌는 야구였을까. 조성훈이나 조르바, 브라톤사우루스가 재미를 느꼈다면 다행이지만 아무런 몰입도 없고 넘어야 할 벽도 없는 그런 경기가 내게 재미있을리 없다.

‘프로’가 가져오는 구린내나는 것들은 단순히 ‘경쟁’에 그 원인이 있다기 보다는 ‘돈을 위한’ 경쟁에 그 원인이 있다. 그래도 작가는 앞에 한 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먹고 살기’는 해야한다는 것 말이다. 뭐, 문제는 ‘먹고 살만’해져도 여전히 남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데 있겠다.

작가가 말하듯 그야말로 관건은 주어진 삶을 재밌게 사는 것이다. 그것도 온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쪼잔한 경우의 수, 확률에 기대어 불안한 세상 맘 졸이며 살기보단 욕심 부리지 않고 무리하지 않고 그렇게 그냥 살면 되는 것이다. 장기에는 모든 개인은 죽기 마련이고, ‘어차피 지구도 멸망한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8점
박민규 지음/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