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누구인가 (존 도미니크 크로산, 한인철, 한국기독교연구소, 1998)

자라온 환경이 기독교적 문화와 거리가 있었던 나는 어릴 적 위인전을 읽은 것으로 그리스도라는 인물에 대해서 처음 알았다. 물론 성탄절이 예수의 생일이라는 것 정도의 수준은 미리 알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s)가 단순히 그의 본명이라 생각했다. 그리스도가 어떤 뜻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바는 사실 전혀 없다. 예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이 미신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어,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많은 사람들을 먹인 일 ― 책에서는 ‘자연기적’이라는 용어로 표현되어있었다 ― , 눈먼 자를 눈뜨게 한 일,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하는 일과 같은 얘기 밖에 아는 것이 없었다. 이런 기적 같은 내용은 마치 사이비종교에서 미리 짜놓은 연기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행위와 오버랩 되어 스쳐갔다. 단순한 이미지의 교차현상이었지만 내게는 부정적으로 인식되었고, 거부감이 들었다. 막연한 기독교 혐오가 생겼다.

예수가 한 말은 모두 입바른 소리였다. 대개가 일생을 좌우명으로 가슴에 지니고 살 만한 것들이었다. 예수의 인생은 영화였다. 예수의 자취나 성경에 나오는 얘기는 모두 하나같이 현세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귀감이 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근본적으로 예수를 믿을 수 없었다. 예수에게만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예외를 허용할 수 없었다. 기적을 행하는 것이나 다시 부활했다는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의구심을 품었지만 예수가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신이라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대로 신과 인간의 아들,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지만 예수를 낳기 전에도 낳고 나서도 처녀인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이라고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접신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지만 나에게 그런 경험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나는 쉽게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현재에 불가능한 일이 1세기라서 왕왕 행해졌다는 것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내게 있어 예수는 그 업적은 훌륭하다고 평할 수 있으나 그와 관련된 일화와 기독교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 때문에 절대로 좋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였다.

저자인 크로산은 예수에 대해서 서술한 각각의 복음서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얘기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비종교인인 나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복음들을 그 문자 자체가 사실이 아닌 고대 예언서를 바탕으로 한 ‘의도적 해석’이라 평한 것이다. 또 우리가 많은 회화나 예술작품을 통해 한 편의 영화처럼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예수에 출생과 유아기에 관한 내용은 거의가 사실적 기록이 아니며 신적 개입을 통한 동정녀의 임신 역시 어떤 종교적인 창작이라고 언급한다. 그는 예수는 단연코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에 갔다. 당시 요한은 하느님을 기다리는 묵시문학적 예언자로서 활동하고 있었고 그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온 자들을 광야에서 정화해 다시 돌려보냄으로서 마음 속 깊이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예수는 요한의 묵시문학적 활동을 이어받았지만 요한의 죽음을 계기로 사명과 운동에 대한 관점을 바꾸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 운동을 전개하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땅에서 만들어 가야하는 것이라 가르쳤다. 이것은 혁명적인 것이며 묵시문학적 예언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회변혁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예수는 배울 수 없는 천한 장인 계급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가 가르친 내용이 논리 정연한 인쇄물로서 남아있진 않다. 예수는 개방적인 공동체를 지향했고 가족이라는 틀을 깨려고 노력했다. 또한 구조적인 악에 대해서 강도 높은 비판을 했다. 밥상이라는 것은 사회의 축소모형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개방된 밥상을 통해 길에서 헐벗은 자를 자신의 식탁으로 들이고 함께 식사를 하라고 했다.

예수는 그의 가르침을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비유로 풀이함과 동시에 직접 몸으로 실천했다. 아마도 이것이 가장 핵심일 것 같다. 예수가 유사 이래 가장 유명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일 것이다.

예수가 기적을 행했는가에 대해서 크로산은 일약하여 “상징적인 표현이다”고 말한다. 오히려 고대의 상징적 표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 현대인들의 무지를 탓한다.

예수는 그의 운동을 확산시키는 방법으로 어떤 중간자적 존재, 매개하는 존재도 만들지 않았으며 하느님 나라와 1:1의 관계를 가지도록 했다. 이것은 곧 실천이 하느님 나라로 가는 방법이라는 직관을 낳는다.

운동을 확산시키는 독려하는 공동체는 개방된 밥상과 무상의 치유라는 두 가지 방법으로 집 있는 자와 집 없는 자(유랑자)를 공동체적 상호의존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바꿔 말하면 계급간의 화해이다.

이제 우리는 궁금하다. 도대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가난한 자가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라는 말을 따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인가. 물론 그럴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라고. 일상에서 가지는 긴장감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십자가형에 처하게 된 예수에 대한 기록은 그 상세함에도 불구하고 모두 구약의 예언에서 옷을 찾아 입힌 것이라고 한다. 또,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도 예수가 실제로 부활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긴 시간으로 해석해서 예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가지고 몇 개월, 몇 년을 버텨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운동의 주도자였던 예수가 예수라는 존재 자체를 절멸하는 십자가형에 처했다는 것은 운동 자체의 중심핵이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남아있는 자들은 그 두려움에 더 이상의 비전을 갖지 못하고 운동을 그만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운동을 일궈냈고 예수는 20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우리와 만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다.

예수는 분명히 인간일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줄곧 품어왔던 의심이었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이해라는 행위를 가능하게 했다. 말이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예수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설명하는 것은 전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예수는 인간임과 동시에 사회 활동가, 혁명가였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와 예수는 현재 그려지고 있는 예수와 용모만 비슷한 게 아니라 사상도 비슷했던 것 같다. 예수는 나와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이 나를 기쁘게 했다. 읽는 내내 든든한 동지를 얻은 것 같았다. 그는 구조적인 악을 거부하고 평등이라는 관점을 지지하면서 왼편에 있는 좌파적인 사상을 지닌 사람이라 생각되었고 복음에 있는 얘기들 역시 하나의 상징이라고 해석하며 받아들이니 그렇게 이해가 쉬울 수가 없었다.

자연기적은 곧 예수의 권위에 대한 비유이며, 예수가 보여준 치유에 대한 기적은 곧 예수가 사회에서 격리된 자들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에 대한 비유였다. 나는 예수에게 기적의 능력이 있다고 원래 믿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한 일은 오히려 신비한 능력으로 조화를 부린 것보다 더 위대하다.

난 이로써 의심이 아닌 확신을 얻었다. 예수는 인간이며, 혁명가였다. 내가 하려는 것, 내가 지향하는 사회 역시 틀린 것이 아니며 이념적인 허상이 아니다. 1세기의 인간인 예수가 어떻게 평등이라는 개념과 밥상을 통한 개방된 공동체 그리고 가부장제의 차별적 행태에 대한 통찰을 얻었는지 그것부터가 ‘기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의 일생이 어떤 식으로 ‘잘못’ 미화되어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는지는 이제 내게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을 읽고 예수라는 인간에 대해서 더 공부하는 기회를 가지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힘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만든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나는 내 정체모를 기독교 혐오를 넘어섰다. 그래서 내가 새롭게 알게 된 예수에 대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 하지만 한편으로 예수를 말하고 가르치는 오늘날의 기독교 현실이 계속 떠올라서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는 예수를 바로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필요도 있다.

글쓴이

Sehee Park

Advocate for Innovators. Lawyer.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