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한일학생회의 도쿄회의 참가기

※ 한일학생회의(韓日學生會議, Korea-Japan Student Convention, 공식홈페이지)는 1986년 창립되어 자매단체인 일한학생회의(日韓學生會議, Japan-Korea Student Convention)과 함께 매년 여름 약 2주 간의 국제회의를 열고 학술회의와 문화교류를 진행하는 대학생 단체. 나는 2004년 한일학생회의 제19기 정대표로 선발되어, 2005년 한일학생회의 학술부장을 역임했고, 제19회 도쿄회의(2004.8.11~26)와 제20회 대전-서울회의(2005.8.2~17)에 참가했다. 아래는 2004년 제19회 도쿄회의 참가 경험을 바탕으로 서울시립청소년문화교류센터 MIZY에 국제회의 참가 경험담 공모에 써낸 글의 전문(원문 바로가기):

한일학생회의 소개

한일학생회의는 1986년을 시작으로 매년 여름회의를 준비하고 참가해온 단체이다. 여름회의는 서울과 도쿄를 번갈아가며 개최되고 한국 대표로 한일학생회의가, 일본 대표로 일한학생회의가 참가한다. 여름회의의 의의는 양국의 젊은이들이 서로의 생각을 여과 없이 공유하고 민족이나 국적을 초월한 우정을 다지는 데 있다. 또한 그 취지는 이런 우정을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 양국의 우호적 관계 증진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제19회 도쿄 여름회의

200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제19회 여름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번 여름회의는 한국 대표 18명, 일본 대표 18명, 통역 6명으로 총 42명이 참가했고, 8월 11일부터 26일까지 15박 16일간 치러졌다. 나는 3분과 분과장이자 한일학생회의 제19기 정대표의 자격으로 참가했다. 한국과 일본에 관련한 6가지 주제로 학술회의는 진행되었다. 학술회의외에도 다양한 행사가 기획되었다. 일한학생회의 멤버의 집에서 하루를 보낸 홈스테이와 도쿄 근교로 떠난 문화체험, 학술회의 주제와 관련한 분과체험, 나가노현으로 떠난 필드트립 등의 행사가 있었다.

여름회의의 꽃, 분과회의

3분과의 분과 주제는 ‘동북아시아 지역의 지역통합’이었다. 국제정치학과 경제학에 관련된 주제라 공부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주제 자체에 흥미가 있었으므로 열심히 준비했다. 한국 측 3명, 일본 측 3명, 통역 1명으로 3분과의 총 인원은 7명이었다. 분과회의는 총 아홉 차례, 오전과 오후에 걸쳐 행해졌다. 총 아홉 차례의 분과회의 기간 동안 무엇을 어떻게 논의할 것인지에 대해 여름회의 전, 온라인상에서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기에 1차와 2차 분과회의는 결국 앞으로의 분과회의 진행에 대해서 합의하는 선에서 끝낼 수밖에 없었다. 회의 방식은 양 측의 대표가 공부해 온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 중국의 경제 상황을 분석하고 경제통합을 이뤄야하는 필요성과 경제통합을 이루기 위한 도정에서 생기는 과제와 그 해결책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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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과회의 (통역 자원봉사자의 후시통역으로 진행)

회의에 허용된 언어는 한국어와 일본어였으며 후시통역이 이루어졌다. 양국의 대표가 만났다는 것이 실감나긴 했지만, 이 때문에 회의 자체의 현장감이나 생생함은 떨어졌다. 게다가 통역 부분도 매끄럽지 못해서 재차 통역을 요청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는 곧 논점을 흐리고 부족한 회의 시간을 더욱 아쉽게 만들었다. 국제회의를 진행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통역이다. 통역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논의가 계속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적절한 단어 표현을 찾지 못해 시간을 지연시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잘못된 통역으로 이 쪽의 의사가 왜곡되는 경우도 있었다. 통역 부분은 회의 참가자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므로 어쩔 수 없었지만 꽤나 불만이었다. 통역이 있는 국제회의에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발언할 때, 통역하기 쉬운 단어로 표현하는 것과 간결한 문장으로 끝내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유의한다면 그나마 매끄러운 회의를 만들어 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총 아홉 차례에 걸친 회의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견을 좁혀나갔고 많은 논점에 합의를 했다. 사전공부와 자료가 부족한 탓인지 분과원들의 사기는 저조했다. 분과회의 진행과 관리를 도맡은 분과장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회의를 해나감에 있어서 분과원을 일일이 챙기지 못했고 회의 차수가 계속 높아감에도 중간 중간 회의 정리를 위한 별도의 시간을 갖지 않았다. 이 문제는 결국 분과회의가 모두 종료되는 시기에 불거졌다. 분과회의의 내용을 정리하는 보고서 제작이 늦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회의를 통해서 자그마한 성과라도 일궈냈다면 분명히 보고서 제작은 신명나는 일이었겠지만 그러질 못했다. 결국 보고서는 간략히 지난 회의를 정리하는 수준에서 마무리 되었다.

나가노 필드트립

필드트립은 도쿄에서 버스로 4시간 거리에 있는 나가노현(長野県)으로 갔다. 나가노현은 1998년 제18회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유명하다. 한일학생회의와 일한학생회의는 나가노현청(나가노시 소재)을 방문, 다나카 야스오(田中 康夫) 지사를 만났다. 다나카 야스오는 그의 독특한 정치적 이력 덕분에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이자 문인이다. 일본 내에서 유명인사인 다나카 야스오 지사를 직접 만나서 얘기를 듣고 질문을 한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지금에서야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지역 고등학생과의 교류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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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노 슌에이 고등학교 향토연구반 친구들과의 토론

나가노 슌에이 고등학교(長野俊英高等學校)의 향토연구반(鄕土硏究班)은 지역의 유적을 통해 역사의 진실을 공부하는 모임인데, 이 모임은 방송을 통해 한국에도 알려진 바 있다. 이 모임의 주된 활동은 마츠시로(松代) 대본영(大本營)에 대해서 공부하고 알리는 것이다. 마츠시로 대본영은 태평양전쟁 당시 장기전을 예감한 일본이 도쿄의 주요 시설을 지하로 옮기기 위해 파냈던 흔적이다. 이 활동 때문인지 향토연구반 학생들의 역사인식수준은 상당히 향상되어있었다. 이 학생들의 안내로 마츠시로 대본영을 견학한 뒤, 교실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들과의 교류를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친구들과 이런 토론 시간을 갖게 될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다양한 화제를 준비했을 것이다.

한일 양국의 왜곡된 역사인식이 가장 강력하게 양성되는 기관인 학교에서 역사교육은 일종의 민족의식과 국가의식 고취의 수단으로 전락되어왔다. 내가 근 몇 년간 품고 있었던 역사인식 역시 무조건적인 피해의식을 연유로 한 편견에 불과했던 것 같다. 향토연구반 학생들을 만나서 하나 느낀 점은 앞으로의 한일우호증진이 덮어두고 화해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잘못된 점이 있었으면 분명히 반성하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루는 것, 그것이 가장 느린 것 같지만 가장 빠른 길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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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오다이바お台場, 하나비 문화체험

여름회의가 내게 남긴 것

약 2주 간의 국제교류활동은 내게 많은 것을 남겼다. 첫째는 현재 내가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한 확신이다. 한일학생회의와 일한학생회의는 지난 20여 년간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들이 젊음을 할애하며 지속시킨 단체다. 매년 치러진 여름회의에서는 한일 양국에 대한 다양한 주제의 학술 보고서들이 발표되었고, 매회 많은 수의 동우회원들을 사회로 배출했다. 한때 나는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는 이 단체와 이 단체의 활동이 한없이 소모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제19회 도쿄회의를 경험하고 난 뒤, 민간외교사절로서 한일학생회의의 역할을 발견했다. 숱한 어려움에도 꿋꿋이 20년을 이어왔던 이 활동에는 단순히 대학생들의 치기가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한일관계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한일관계에 대한 뚜렷한 나의 입장이다. 한일관계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해결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한류열풍을 근거로 최근 한일관계는 부쩍 해빙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한국과 일본의 정상이 정기적으로 만나게 되고, 한-일 FTA 협상 역시 착착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사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또 일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 참배 역시 담담히 이어지고 있다. 한일관계를 정공법으로 풀려면 여태껏 걸린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어려움이나 충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충돌을 통해서 어긋난 부분을 서로 절충하기 위해 노력하고, 다시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진지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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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도쿄회의에 참가한 한일학생회의, 일한학생회의 및 통역봉사자 전원

나는 이러한 나의 입장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2005년 제20회 서울회의를 준비하는 학술부장을 맡았다. 여름회의를 준비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큰 경험이지만, 한국과 일본, 양국의 상호 우호 증진에도 큰 의미가 있다. 앞으로도 이 단체의 존재와 활동이 진실한 한일관계를 재설정하는데 밑거름이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범함

정확히 2004년 2월에 상경, 좋아하는 책들과 아직 덜 읽은 책들과 그리고 공부하는 책들, 입을 옷, 이렇게 주섬주섬 챙겨서 연희동 하숙집으로 이사했다. 그렇게 3월, 4월, 5월, 6월, 7월을 보냈다. 정확히 5개월을 이 방에서 보냈다.

어제 파병반대 집회에 참석한 뒤에 H형과 김밥천국에서 허기를 채우고 나서 생활에 대해서 얘기했다. 요전까지 나의 무기력하고 불규칙하며 무계획적인 생활에 대해서. H형은 한마디 해줬다. “가족이 없어서 그래.”

가족이었다. 난 정확히 18년 2개월을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밥은 언제나 아침 점심 저녁으로 어머니께서 준비해주셨고 빨래도 물론 어머니께서 해주셨다. 방청소는 내 몫이었지만 어쨌든. 난 내 생활의 대부분을 가족과 공유하고 있었고 알게 모르게 가족들은 내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생활하면서 많은 것을 이루고 배워나가리라, 했던 당찬 결심은 이내 흔들리고 마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하나 둘씩 날 발목 잡았다. 모든 일을 나 혼자 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한 편으로는 벅찬 일이다. 더군다나 생활이라는 것은 순환의 고리와 비슷해서 한 번 악순환의 싸이클을 타면 쉽사리 헤어날 수 없다.

오늘 하숙집을 비우기 위해서 짐을 싸면서 이것저것 생각했다.

내가 이루려는 것이 무엇이든, 내가 내 삶을 통해서 실현하려는 의미가 무엇이든, 정말 그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 위대해지자고 스스로 위대하면서도 초연해지자고. 정말 지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시 비범해지자고 생각했다.